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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 로메로] 메마른 땅 위에는 올리브 가지 본문

1차/etc.

[블랑카 로메로] 메마른 땅 위에는 올리브 가지

루카 Luka 2022. 2. 27. 05:38

 

비로소 블랑카는 난폭한 파도가 닿지 못할 곳으로 간다.


서서히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첫마디를 넘어가면 순식간일 것이다. 그래, 이건 천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과정과 유사하다. 블랑카는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사지에 힘을 뺀다. 내쉬는 숨은 끝이 없을 것처럼 깊고, 또 깊어서… 블랑카는 자신이 구멍 난 풍선처럼 힘없이 가라앉을까 걱정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는, 물 위로 떠 오르기 위해서는 온몸의 힘을 빼야 한다.



근거 없는 미신이 난무하던 중세에는 마녀를 판별하는 방법의 하나로 몸에 돌을 묶은 채로 물속에 사람을 던지는 것이 있었는데, 블랑카는 마치 지금 그런 시험에 든 것만 같았다. 중력에 순응하듯 허공으로 떠밀려 추락하는 몸과,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의 걸음 소리… 몸이 가라앉든 떠오르든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면, 구경거리처럼 전시되느니 바다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해구의 그 틈,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그곳에서 지금껏 외워온 시가 떨어질 때까지 시를 외워도 좋았다.



블랑카는 지금 차가운 수면이 날카롭게 자신을 때리는 것을 느낀다. 너무나 차가운 나머지 마비되는 것만 같은 감각. 곧 귀와 코를 먹먹하게 채울 짠 바닷물은 오래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던 어린 시절…



백년에 한 번씩 깨어난다는 눈의 거인 얘길 해줄까
지구만큼 오래 산 눈의 거인은
봄이 시작될 무렵 밤에서 깨어나지
거인은 무수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블랑카는 입속에 고이는 시구를 뱉어내지 못하고 망설인다. 꼭 그만큼의 숨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꾸었던 꿈과 파도를 타고 뭍으로 올라온 이야기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운 날의 이름이 낱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좋은 일이려나. 얕은 숨을 뱉어내며 무거운 눈을 깜빡이면, 심장 소리와 닮은 것이 지면을 울리고 다급한 군홧발들이 시선을 스치고, 그 뒤에서 파도가, 그 언젠가 보았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본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파도에 휩쓸려왔다. 수많은 풍랑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으려 애썼고, 자그마한 나룻배치고는 꽤 오랫동안 버텨오지 않았나. 그러니 이제는 쉴 때가 온 것이다. 나룻배는 폭풍우 속에서 조금씩 마모되고, 부서지고, 그러다 제 몫의 수명을 다해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누군가 두렵우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을 위해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겠으나 누구도 묻지 않았으므로 블랑카는 가라앉는 것이 두렵다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금 얕은 숨을 들이켜고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금, 그는, 바다로, 향하고.



거대한 배에서, 바다로, 던져지고,


뭍에서,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 앉,


는다.


 

 


언젠가 이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 빈 곳을 디뎌 아득히 떨어지는 기분. 그렇게 아래로 가라앉다가, 해구의 바닥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보이는 별의 개수만큼 시를 읊자. 이 숨이 멎는 날까지….



그러고서도 외롭거든, 다시는 보지 못할 파도를 그리워해야지.

 


어떤 유언도 당부도 애원도 없이 파도는 멎는다.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왔으나 그는 뭍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가지는 주인도 없이 마른 땅에 버려진 채 잊힐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


* 강성은, Lullaby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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