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디] 오로지 사랑의 잘못
AT 533, 여름.
미툴라의 레드메인 저택.
길고 긴 연구를 끝마치고 삼일이나 지났을까. 카렌은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아 다음 할 일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애썼다'라는 표현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으로, 당연히 떠올라야 할 것은 떠오르지 않고 애꿎은 생각이 앞다투어 자기주장을 해대는 탓에 곤란할 지경인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기 적절한 단어였다. 연구를 빌미로 미뤄둔 생각이 많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실상 우선순위가 뒤바뀐 쪽이 옳겠으나 해야 할 일과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는 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는 한 우선순위가 낮은 쪽은 되도록 그대로 놓아두고 싶었다. 사적인 감정에 관한 문제 같은 것. 마물의 습격과 눈사태가 적절히 맞물려 조난 당하고 말았던 기억, 함께 고립된 사람에 관한 것.
죽음은 한낱 인간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카렌은 빌어먹게도 그것을 잘 알았고,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사신의 끔찍한 낯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마치 가족들의 일에 그랬던 것처럼 그럴 줄 알았다며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어야 마땅하겠지. 카렌은 그때만큼 자신이 사신의 그림자를 지워보려는 노력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통감했던 적이 없다. 이러다 사람이, 선배가, 기디온이 죽으면 그때는…
죽지 마세요, 죽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죽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생길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게 오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영영 유예받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말았던 순간, 카렌이 예상하고 가늠한 것보다 더 의미를 가져버리고 말았음을 직감하고 말았다. 적어도 카렌 아처라는 사람에게 바라도 소용없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북부에서 적으로 마주쳤을 때와는 달랐다. 오히려 그때가 죽음과 더 가까우면 가까웠으며 심지어는 그도 기디온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망설임을 가져오지도 않았지. 반대여도 마찬가지였지 않나. 그곳에서 죽음은 사소한 일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누군가는 행해야만 하는 일. 그렇다면 오두막에서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서 절박했는지. 기디온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 마물이라서? 선배의 생사가 그의 손에 달리지 않아서? 글쎄… 누군가는 이런 감정을 품을 수도 있겠으나 그는 감히 상식 바깥을 상상했던 적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기디온을 떠올리면 카렌은 불편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가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리면 아주 역한 것을 삼킨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고, 가끔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것들을 증상이라고 부른다면, 카렌이 그저 아픈 것에 불과하다면… 북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처럼 아주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면 오랫동안 앓고 일어나면 해결될 일이지 않을까. 기디온은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지만 이런 '감기'는 도움조차 바라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증상을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사고 말 테니. 그는 정말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게 분명했다. 심지어는 스스로를 속이는 일조차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명백하지 않나.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밝혀질 뻔한 진실을 모를 리 없다. 카렌은 이 증상이 가리키는 '병'의 이름을 알았다. 많은 예술가와 젊은이들이 예찬하는 그 이름. 가끔은 논리와 합리를 꺾고 오만하게 고개를 드는 사랑. 빌어먹을 사랑….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표현은 또 얼마나 적절한가? 난데없이 푹 팬 땅에 걸려 넘어지거나 그 아래로 추락하고만 심정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사랑에 빠지는 건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애초에 기디온을 신뢰하기로 한 것도, 기디온이 있는 곳까지 울타리 안이 되는 것도, 이렇게까지 의지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카렌은…
기디온은 어떤 것도 카렌의 계획과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아마도 그래서 카렌이 예측한 범위 바깥을 성큼성큼 걸어 다니곤 해서 불안했던 것이 분명했다. 카렌이 보는 그는 늘 과감했고, 합리적이었고,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고, 손해를 봤고, 이득을 추구했고, 사람을 신뢰하면서 신뢰하지 않았고,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알았고, 똑똑했고, 가끔은 알면서 아둔한 사람이 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어떤 것이 진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으므로 번번이 예측에 실패하고 만 것이 분명했다. 이건 다 선배 탓이에요. 카렌은 그를 원망하고 싶었으나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랑, 오로지 사랑의 잘못이겠지.
그리고 사랑은 누구에게 깃들었지?
사랑이 노래하듯 속삭이면 카렌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에게 깃들었지. 그 사랑은 나의 것이지…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