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들의 소음
나는 사랑을 말미암아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중이야. 무너지는 순간에서야 애지중지 하던 것이 모래성이었다고, 이보다 헛된 일은 없을 거라고 조소하면서도 멍청한 울음이 그치지 않아. 봐, 내가 좋아하는 비처럼 내리고 있어. 비가 내리면 모래성은 이렇게도 쉽게 무너지지. 나도 전부 다 알고 있었어. 이럴 줄 알았어.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어떤 황금성도 영영 빛날 수는 없는 법이지. 무너진다 한들 고작 모래성일 뿐인 것을 누가 신경 쓰겠어. 그러지 않아도 비가 내리면 모래성 같은 건 무너지는 것이 옳아. 고작 모래성이라면. 그래, 당연하게도.
무너지기 전에는 어땠냐 묻는다면, 가장 찬란히 빛이 났다고 말할 거라고. 그러나 그 찬란함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다. 좋아해, 말하면 곧 불행이 덮쳐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미신을 믿듯 근거도 없이 닥쳐올 불행을 신봉했다. 하물며 신앙도 아닌 것을.
좋아해.
입술을 둥글게 모으고 좋, 입을 작게 벌려 아, 그것보다 조금 크게 벌려 해, 발음하고 나면 그 대상이 사라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이. 그는 스스로를 보며 비웃곤 했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고작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언젠가 사라질 것이 두렵다면 애초에 바라지 않을 수 있었다면. 욕심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할 때 시작되었다더니 꼴이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고작 그 한마디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했으나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자신이 마음 다해 아껴온 것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보라고 말했지만, ’좋아해‘하고 말하면,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면 그 역시 언제 돌변해 사라질 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해변의 모래성처럼. 놀이터에 만들어 둔 두꺼비 집처럼. 애써 온 마음을 다한 상대가 그렇게 사라진다면 그때는 누가 그를 위로한단 말인가?
한때는 순간의 사랑으로 불행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불행에 닳고 닳았고, 제 자신의 불행에는 지겨울 정도로 시달렸으므로 아주 작은 사랑만으로 삶을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사랑‘ 그 얼마나 달고 해로운 감정인가?
사랑으로 입안이 달아 온통 아렸다. 달고 끈적하게 입 안에 엉기는 간식처럼. 그래도 마냥 좋았던 것이 있다. 단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삼켜야 할 약은 더더욱 쓰게 느껴질 것을 그때는 알았던가? 알았더라면 언젠가 식어 보잘 것 없어질 감정에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괴롭고 외로운 것을 이유로 아주 천천히 입 안에서 굴리고, 또 굴리다가 혀를 베이고 말았을 것이다. 멍청하게도. 삶은 홀로 보내야 할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사랑을 꿈꿨다. 자신을 다정하게 보듬고 안아줄. 그리고 사랑을 말해도 사라지지 않을 이를 원했다. 누군가 앗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이를 원했다. 계기란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것이 불러올 파장은 너무나 컸다. 그는 사랑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일이 힘겹고 고통스러워 빼앗긴 뒤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치 바오밥 나무의 새싹을 솎아내는 어린왕자처럼 간절하게. 그러나 그에게는 별이 없고, 땅이 없고, 하물며는 장미꽃 한송이조차 없었다.
별도, 땅도, 장미꽃도 없는 이가 무엇이 될 수 있나? 그는 추락하고 부서지는 것의 우두머리, 검은 파도가 밀려오면 속절없이 무너질 모래성의 주인.
어쩌면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정말 좋아할 지도 몰라. 무너진 모래성을 바라보면서, 사랑이 뭐라고, 고작 사랑이 뭐라고. 심술 맞게 중얼거리다가 그만 울어버리고 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게 영원할 수 있다면 더는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거짓으로 고백하며 입맞출 수도 있었다. 사랑해, 좋아해.
말하고 나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내가 싫어?
내가 네게 가벼웠어?
내게는 무거웠어.짓눌려 죽어도 좋을 만큼은…. 사랑은 유일한 거잖아. 유일하니까 무거워야 하잖아.
나는 아직 사랑을 보낼 준비가 안 됐어.
무서워.
제발 나에게 가혹하게 굴지 말아 달라고. 이 차가운 계절만큼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마치 추위에 떨다 곧 죽음을 예견한 사람의 체념과 유사했다. 알고 있다고. 이 추위에 얼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추위가 볼을 스쳐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으나, 언젠가 사랑했던 목소리가 울지 말라고 속삭인 덕분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법이 없었으며 함께 울어주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몫의 사랑만이 남아있을 뿐이라서…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묻지 못할 질문을 울음 대신 삼킨다. 이게 치명적인 독극물이었다면 좋겠다. 사랑이 끝나면 나도 죽었으면. 사랑과 나는 함께 죽어야 마땅할 거야. 사랑 덕에 불행 속에서 발 끝을 들고 허덕일 수 있었으니까.
잔인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이 병이라고 선고내린 이는 그를 사형대에 올린다. 고작 사랑이라고. 겨우 사랑일 뿐이라고. 칼날이 떨어지면 다시 한 번.
사랑은 병이며 아픈 것은 오로지 너 하나 뿐이라고.
그리고 그에게 남은 사랑. 목 떨어진 사랑.
그 사랑은…
이제 오로지 사랑은 나만의 몫이라고.
어째서 우리는 고독을 예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고독은 지척에 널려있고, 그는 고독할 것을 알면서도 목 잘린 채 살아야 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