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문득 바람이 좋은 날에는
문수지라는 사람을 이루는 것들을 문장으로 나열하면 어느 흔한 연극에 나오는 단역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왜, 어디든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말이다. 얼굴이 있지만 없는. 영화에서 흔히 스쳐 지나가는 행인, 주변인… 그런 것. 세상에 주인공처럼 빛나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곁에 서 있을 평범한 사람들도 필요한 법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그 사실에 입안이 쓰게 아려오곤 했다.
- 난 아직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장난스럽게 말하면 말에 담긴 의미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만 같았다. 동글동글한 자음을 받치고 문장을 앞으로 떠민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자신 말곤 모를 것이라고.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다. 가벼이 떠밀려 앞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든 도착해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 탓도 있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 못해도 중간은 가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감이 아닌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마는. 차라리 체념했더라면 편안했을까?
'글을 쓰고 싶어요.'
말을 했더라면 달랐을까. 그럴 수 없던 것은 합격한 대학의 이름을 보고 웃던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애정을 기반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으나, 태생부터 외로웠던 문수지로서는 한 줌 애정이 바람 불면 날아갈까, 내내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교 시절 붙어 다니던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녀에게 퍽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적어도 그들의 애정은 어느 날 바람이 분다고 하여 다급히 모습을 감추는 종류는 아닌 것으로 보였으므로. 이 역시도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망상가의 시선일지도 모르지만, 수지는 적어도 그런 애정을 그들에게 품고 있었다.
이를테면 모든 연유가 사랑인 셈이다. 사랑이라 하면, 연인으로서의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사랑, 친구로서의 우애며 온갖 것이 해당하겠지만 구태여 구분할 이유는 없으니 그냥 두기로 한다. 어떤 것들은 그저 흐르는 것으로 의의가 있기도 하고, 외로움을 느낄 만큼의 섬세함은 갖추고 있지만, 그것의 근본을 파헤치기보다는 해결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수지, 그녀였으니.
그래도 언젠가, 문득 바람이 좋은 날에는 '글을 쓰고 싶다.' 고 말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분은 들었다.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