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여휘] 침묵의 화원
2019.12.14
세레스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죽음 역시 순리이며, 신이 의도한 바가 있다고. 우리로서는 위대한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그리고 지휘사가 교회를 찾은 날도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정말 다르지 않았던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처음 만난 그들은 유사한 부분이 존재했다. 스물을 조금 넘은 지휘사와, 서른을 앞둔 수녀처럼 위화감 드는 조합에서도 분명히.
지휘사가 교회를 찾은 날. 그날은 세레스는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지휘사 역시 갓 중앙청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둘은 아직 접경 도시는 물론이고 서로를 모르는 상태였다. 신자인 줄 알고 입교를 권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입교할 마음은 진작 접었으나 아직도 어린티를 덜 벗은 얼굴에 대상도 불분명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보고 언제든 와서 쉬다 가도 괜찮다, 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그것은 값싼 동정에 가까울지라도 이 역시 그분이 의도한 것이리라. 세레스는 빈 물뿌리개를 늘 두던 야외 선반에 올려두며 생각했다.
세레스의 중갑옷은 움직임에 따라 소리가 났다. 검고 푸른 금속과 금속이 스치어 우는 소리. 스산한 바람이 불 때면 그것이 진정 누군가의 흐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로 긴 갈색머리를 곱게 빗은 지휘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언제나처럼 온실의 식물을 돌보기 위해 나서던 세레스가 눈을 휘어 웃었다.
"어서 오세요, 지휘사."
오늘은 무슨 일인가요? 묻지 않아도 먼저 조잘거리는 것이 듣기 좋았다. 이전의 기억이 없다던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지. 세레스가 식물을 손질하고 물을 주는 내내 옆에서 지저귀는 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기 혹시, 바쁜데 내가 귀찮게 구는 거야?"
"아니요, 지휘사의 목소리를 듣는 중이었을 뿐이랍니다."
"세레스도 참. 항상 다정하다니까?"
그래서 내가 세레스를 좋아하잖아, 하고 소리내 웃은 지휘사는 때마침 물이 동난 물뿌리개를 발견하곤 손을 내밀었다.
"물 더 채워올까?"
"제가….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고개를 크게 끄덕인 지휘사는 온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급할 것도 없는 일에 항상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미련한 사람. 세레스는 그럴 수 있는 지휘사가 곧아 보여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온실을 박차는 그 뒷모습을 언젠가 보았던 적이 있던 것만 같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들은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지휘사의 여린 살결은 중갑으로 덮인 손이 닿으면 부러 그러지 않더라도 쉽게 상처 날 것이다. 뛰어나가는 그를 차마 부를 수 없던 것은 사명으로부터 비롯한 무겁고 날카로운 손 탓이다. 아니, 아니. 모두 변명이다. 세레스는 자신이 믿는 신이 뛰쳐나가는 그를 막지 않기를 바란다는 직감이 있었다. 까닭도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직감도 있는 법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직감이라 부르는 것은 전부 그분의 의도일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세레스는 그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지휘사가 물뿌리개를 두 손으로 들고 돌아오자 그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감사해요, 지휘사."
겨우 물을 떠 왔을 뿐인데? 별것 아니라며 웃는 얼굴은 정말 어렸다. 보드라운 뺨과 나무의 빛깔을 닮은 눈동자는 어리지 않을지언정 참으로 여렸다. 거센 비라도 내리면 그 사이로 녹아 사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세레스는 어쩐지 오늘, 지금 이 순간이 그를 만나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것도 그분의 뜻일까?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한 기시감이 상상과 기억을 죄 헤집어두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만약 오늘 그를 교회에 잡아둔다면,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세레스, 괜찮아?"
"아…. 네,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들어가서 쉬어야…"
"정말 그런 건 아니랍니다. 아직은 들어갈 수 없어요. 제가 돌보아야 할 꽃들이 이렇게나 많은걸요."
괜찮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세레스는 그렇게 말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겨우 기시감이라고 표현할만한 가벼운 느낌이라기보단, 존재했던 과거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교회를 떠난 지휘사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내일 또 올게, 말해두곤 원치 않게 약속을 어기고 말 테다. 그것은 교회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방 거리, 중앙청, 시가지, 항구에 사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빚이 되겠지.
지휘사는 오늘이 지나면 접경 도시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것이 계시라도 되는 것일까. 만약 세레스가 신을 믿지 않았더라면,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휘사가 오늘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아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지휘사를 슬프게 하는 길이더라도, 어쩌면. 그러나 이곳의 세레스는 신을 믿어 수녀가 되었으며 그분의 뜻을 이행해야 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나 세레스는 오늘 그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벼운 죄책감을 느꼈다.
"헉. 벌써 깜깜하네…."
시로도 걱정할 테고, 할 일이 남았으니 슬슬 가봐야겠다며 시간을 확인하던 지휘사는 중갑옷의 수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의문을 표했다.
"응?"
"오늘 예쁘게 핀 꽃이 있으니, 가져가시겠어요?"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잔인한 죽음 앞에서 그 무게를 훼손하지 않고, 특별히 생각해 마지않던 지휘사를 위해 꽃을 건네는 것. 지휘사가 선택한 그 길을 끝까지 마주하여, 마지막 그 눈을 외면하지 않는 것.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여 이 숨결을 기억하되 영원토록 슬퍼하지 않는 것.
죽음 앞에서 생명은 모두 공평하여, 어린 시절 사랑하던 고양이를 보내는 기분과 지휘사를 보내는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슬픔 역시 옅어질 것이다. 지휘사는 세레스가 건넨 꽃다발을 주저하다 받아들었다.
"정말 고마워, 세레스. 잘 간직할게."
"당신이 어디로 향하든 당신과 잘 어울릴 꽃이에요."
나보단 세레스에게 어울리지, 같은 말을 할 법도 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나 이제 갈게."
"그럼 안녕히. 지휘사."
또 올게, 같은 말은 없었다. 지휘사 역시 무언가 예감한듯했다.
끝나가는 생명이. 마지막까지 찬란히 빛날 수 있기를.
세레스는 지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생명이 동등하다. 되새기는 기도 사이에 답지 않은 흐느낌이 섞일까, 세레스는 그것이 두려웠다. 당신으로 하여금 흐트러지는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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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세레스가 여휘에게 건넨 꽃은 백일초(백일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