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
20210925
체스터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화마에 관한 상상을 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환하게, 무엇보다 환하고 뜨겁게 타오를 화마. 인간의 힘으로는 차마 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카멜리는 마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으며, 어쩌면 카멜리가 원래 세계에서 살아갔더라면 이루어졌을 미래의 한 갈래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린에서 밀레시안이 된 그 순간부터, 혹은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부터 요원한 일이 되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에린에서 마법을 배우는 일도 어쩌면 마녀가 되는 일의 일부겠지만, 그 행위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바로 소원을 이루는 법. 에린의 마법은 허공에서 불덩어리를 만들어낼지언정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잃은 것을 되찾게 해주지는 않았다. 연금술 역시 비슷했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비를 내릴 수는 있어도, 골렘을 만들어 움직이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잃은 것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잃은 것을 되찾는 법'에 대해 묻고 다닌다면, 필히 무엇을 잃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으로, 카멜리는 아직도 그 질문에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할지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무엇을 잃었는지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심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떤 신에게 소원을 이루는 법을 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들에게 카멜리야말로 소원을 이루는 도구에 가까울 테니.
어떤 빛 아래서도 바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금발에 밝은 푸른색을 띤 눈동자. 태생은 고귀했을지언정 맺음 없는 삶에서 시작이란 중요치 않게 되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태생같은 것은 그의 추락을 설명할 때, 극적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호사가들에 의해서 언급되곤 하였으나 곧 잊혀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그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부터 가문과 나라까지 잊혀질 즈음, 운 좋게 수용소를 탈출했다. 어쩌면 탈출을 바라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우연 하나가 그를 이끌어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일지도. 그러나 이베트는 찰나의 순간 바라본 세상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름 하나만을 쥐고 다시금 세상으로 향한다. '아, 세상이 이렇게 빛이 났었지. 이토록 찬란했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살아도 될까. 죽음을 허락받지 못했으니 삶을 허락받은 것이 아닐까.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으려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방패도 없이 양 손에 검을 들고. 떠돌이들의 검술을 어설프게 배우고, 죽고, 또 죽어가면서도. 죽음이 허락되지 않은 삶을 핑계삼아.
먼 곳에서 바람이 분다. 겨울로부터 부는 바람은 서늘하고 망설임이 없다. 여담홍은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갈무리해보다가, 그보다 거센 바람이 불자 몸을 맡기듯 눈을 감아버린다. 비로소 홀로 남았다. 저 역시 고작 사랑에 휘둘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버린 것이 있다. 후회하게 될까. 여담홍은 자신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부정하기에는 무엇인가 짙다.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짙었다.
이브 테일러는 끝없이 돌아가는 태엽 위에서 달리는 것이 숙명이 사람으로서,
연지는 주변보다는 많은 연애 경험이 있었고, 금방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언젠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감으로 연애를 하곤 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가까웠으나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연지는 구태여 그것을 구분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연지의 연애 대부분은 소꿉친구인 지해가 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다시 말하자면 지해는 연지의 연애사 전반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친구의 연애사를 아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건만 지해에게 유난하게 느껴진 이유는 따로 있다.
지해와 연지가 오로지 둘만의 관계에서 그쳤더라면 상황이 이보다 순탄하였을수도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가족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누군가 저울에 추를 하나 더 올리거나,
유진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어본 적은 없었으나
세상이 바라는 사랑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이고는 했으므로 그리 큰 고민 없이 오르골 인형처럼 사랑을 흉내냈다
운명같은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어요. 정말이요. 운명과 같은 사랑... 가진 것 없이 가난한 마음에 깃들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희망.
나는 상실에 관하여 쓴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라면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과격한 표현과 그것과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불안정한 표정.
루시와 북극성과 그리고 우주와 아주 먼 곳의 불명확한 전파와
불명확한 행복과 확실한 불행이란
우리는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날았지
추락하지 못하는 것들은 침몰하는 거야. 으례 배가 그러는 것처럼. 나는 조각배도 아니건만 어디까지 침몰하는걸까. 고독한 심해로 가라앉아 먼 미래에 구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거야
내가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는 너는 어딘가 낯선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너를 상상하는건 내게 퍽 끔찍한 일로, 네게는 이런 내가 조금 더 끔찍하게 느껴지겠지만
제발 나를 데려가 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어딘가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네가 낯설게 느껴질때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것만 같았다.
한때는 손에 쥐고 있었지만 이제는 잃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 무엇을 잃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 말이야.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것과 여러번 버리고 떠나보내도 돌아오는 것. 아무리 곱씹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나 단 한 번 혀 끝을 대었을 뿐인데도 녹아버리는 달콤한 감정에 관한 생각은 무슨 짓을 해도 멈출 수가 없어. 어떤 것은 손쉽게 유실되고 어떤 것은 사라져라, 사라져라 염불을 외듯 속삭여도 사라지지 않아. 그것들은 어떤 부분이 달라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 그 답을 알면 붙잡고 싶은 것은 남고, 떠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떠나게 될까?
영원한 이별의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원이가 먼저 떠나버리는 상황이면 네가 어떻게 날 두고 먼저 가냐는 식의 말을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 여담홍이 선택해서 떠나는거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잘있으라는 짧은 인사가 전부겠지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많아도
"어떻게 사람의 목숨과 세계를 저울질 하냐고 누군가는 손가락질 하겠죠. 그렇지만 제가 그 세계에서 얻은 값진 것이라곤 당신 뿐인 걸 어쩌나요."
"대부분의 가치가 사라져가는 지금에서야 우리가 개인과 개인으로 만날 수 있는건 나쁘지 않네요…."
"이젠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는 순간을 붙잡기 위해 영원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이현은 때때로 순간을 붙잡기 위해 온 생을 쏟아붓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감추지 못했으나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순간을 붙잡으려고 하는 우리는 얼마나 바보같은지. 그러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연속된 순간을 모아 우리의 영원이 될테니.
이현은 글을 쓰는 일이 순간을 붙들기 위한 발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할지도. 그러나 그의 사랑을 떠올리면 연속된 순간이 언젠가의 영원을 만들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는 아직도 꿈속에 살고 싶은가 봅니다."
엘리엇은 어느 밤과 다르지 않은 날, 그러니까 어제의 밤과 똑같은 오늘의 밤.
그러니까 엘리엇은 알량한 욕심으로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해류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예컨대 이것은 하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고민이었다.
엘리엇은 한때 국제경찰 마약단속부 소속이었고, 불미스러운 일로 그곳을 나온 뒤에는 꿈에 대한 작은 미련으로 뉴욕의 형사가 되었었다. 과거가 이렇네 저렇네 떠들어도 지금은 그저 뉴욕 변두리의 게으른 책방 주인일 뿐이었다.
기실 유진은 최유권을 포함한 세상 누구도 사랑할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는 그녀가 너무 건조하고 각박하며 그저 매정한 인간으로 느껴질까 우려하여 설명하자면, 사랑은 그녀의 삶에서 너무나 불안정한 가치를 가졌으므로 유진의 입장에서 투자 가치가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언제는 마음대로 되던가. 유진은 인간이었고, 인간은 늘 곁에 있는 것에 정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어 오랫동안 지켜보기 나쁘지 않았다. 그 손가락으로 건반을 가볍게 오갈때면 더욱 그러했고, 건반 위에서는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자신에게는 더없이 어리숙하게 구는 때에도 그랬다.
(탐정 사무소)에는 직원이 단 한 명 뿐이었다. 넉넉한 크기의 건물의 1층은 탐정 사무소가 위치해있고 2층에는 세를 놓아 숙소로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 숙소 중 한 곳은 탐정 사무소의 유일한 조수인 소피아가 머물었다. 특별히 직원 할인가가 적용되어 조금 더 싸게 방을 제공받으니 불만이랄 것도 없었다. 애초에 여자 혼자 나가 사는 것 자체가 위험한 때에 직장과 붙어있는 안전한 숙소를 제공 받는 것 치곤 굉장히 싼 값이라고, 없는 살림에도 소피아는 생각했다. 물론 돈이 없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나쁜 가격은 아니었다.
소피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성은 애버리,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인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 대체할 단어를 찾을 수 없으니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소피아는 이것이 '평범'하다는 점에서 염증을 느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겠지만, 도시에서 떨어진 곳이 으레 그러듯 사고방식 역시 조금 낡아있었고, 그의 아비는 '여자'가 큰 소리를 내는 것마저 못마땅해하는 사람이었다. 정비공이라 더더욱 그러했을까?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소피아의 어머니인 (이름) 역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라 당연한 수순처럼 같은 마을의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리하여 소피아의 세계란 고루하기 짝이 없는 편견으로 가득 차버린 것이다. 뭐, 아닌 구석도 어딘가는 있었겠으나 그것을 찾아낼 만큼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소피아의 생물학적 아비라는 사람은 술만 마시면 극단적으로 돌변했다.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나 그에 준할 정도로는 굴었다. 실제로 맞지만 않았을 뿐, 위협적인 느낌을 받았으니 더 할 말이 있으랴.
어느 순간 소피아는 그것을 참고 싶지 않아졌을 뿐이다.
아마 (엄마 이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그래서 소피아는 정비소에 꽤 오랫동안 놓여있던 바이크를 훔쳐타고 가출했다. 고루한 집안에서 자란것 치고는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하여 우연이 맺은 인연으로 탐정 사무소에 고용되었다. 사무실의 사장격인 탐정은 곰처럼 수염이 복실복실한 아저씨였는데, 소피아는 그의 안경을 찾아주는
소피아는 이 모든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소피아는 모친이 부재한 뒤 온갖 집안일을 제 몫으로 껴안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성인이 되기 위한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였고, 때문에 정비소 일을 배울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피아 애버리는 탐정 조수다. 현재로서는 그를 설명할 단어는 그것이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소피아는
내가 아니면 그 누가 너를 이해할까?
기차를 지나는 모든 풍경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다만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이 건재했다.
허쉬는 너무나 손쉬운 죽음을 저울질한다.
...
죽음은 방아쇠 한번에 찾아오는데, 왜 나는 삶을 선택하여 이토록 깊은 고뇌를 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삶이 죽음보다 더 고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결론은 누가 내렸을까? 죽음이 더 고귀했더라면 내가 살고자 했을까? 허쉬는 여러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다. 삶이 천대받는 것이었어도 삶을 선택했으리라.
대체 왜? 대체 왜...
왜...
그렇게 삶에 집착할까
가져보지 못한 것이라서?
한낮의 해가 쏟아지면 온 세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유진은 아직도 종종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선 채 버티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차라리 발끝으로만 서있었으면 나았을까. 목덜미에 아주 가느다랗고 투명한, 그리고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줄이 관통해있어, 이 자리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같았다.
결국은 제 목을 조르게 될 끈을 알면서도 쉽사리 자를 수 없는
유진은 무대에 서있기를 원한 적이 없다. 상품으로 내놓은 적은 더더욱 없을 뿐더러 바라 보는 것조차 허락한 기억이 없다. 나는 인형이 아닌 사람이에요.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독립된 개체라고.
유진과 유권은 어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니었으므로 사랑이 그들을 구원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 그들을 곧게 서게 만들었다. 존중이 그들을 지탱했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꼭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원받지 못해도,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속삭인다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유진은 그것이 만족스러워 웃는다. 사랑으로 세상이 무너지거나 재건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맛볼 수 없는 것들의 맛을 상상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가령 허쉬가 즐겨먹는 초콜릿이나 달콤한 디저트와 유사한 맛을 낼 것이고, 분노는 보다 서늘하고 알싸한 맛, 슬픔은 짭짤하고 산뜻한 맛, 사랑은…
허쉬는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을 닫았다. 어느새 한 해를 전부 써내려간 여백에 서서 숨을 내쉬어본다.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생경하고, 다시는 돌릴 수 없는 것들을 곱씹는 일은 여전히 고통스러웠으나 영영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살아있구나. 여전히 살아있구나. 여전히 아끼는 사람들이 같은 하늘 아래 유사한 방식으로 숨쉬고 있다. 그래, 이 끔찍한 삶에도 사랑스러운 것들이 남아있다.
세상 어딘가에선 끝없이 무언가 떨어지고, 그것들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히 깨어지더라도
올가미를 상상한다
비눗방울처럼 연약하게 터져버리는 것이 있다
나의 벽과 삶과 얄팍한 믿음같은 것들이
그렇게
그순간 나는 직감한거야. 너를 좋아하지 않는 날은 오지 않겠구나. 널 미워해도 사랑하고 있겠구나. 애정과 미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영원히 미로를 헤메이는 미노타우르스가 되고 말겠구나...
사랑이 왈츠라면 영원토록 아름다운 춤을 출 수도 있었을텐데
홀로 추는 왈츠는 우습겠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을것만 같아.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비가 내리는 날이면 허쉬는 종종 물 속에 가라앉는 꿈을 꾸곤 했다. 어디로 이사를 가도 비슷한 구조의 방 한칸 통째로 물에 잠기는 상상. 마치 스노우 글로브의 장식이라도 된 것처럼 위도 아래도 구분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꿈.
폭우였다.
허쉬는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든다. 이베르가 아끼던 것이다.
그녀는 몽중의 티파티를 상상한다.
허쉬는 꼭 본인의 어투처럼 더듬더듬, 서툴게 감정을 짚는다. 삶을 위해 통째로 도려낸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졌을리는 없지만, 내다 버린 것들이 어느날 마법처럼 돌아오지도 않는 법이다. 그러니 허쉬는 오랫동안 잊어야만 했던 것들을 꺼내보며, 어린 시절 추억에라도 잠기는 것이다. ...
가끔은 당신에게 허락받고 싶었어요. 이름을 부르게 해도 되냐고 물을 걸 그랬나봐요.
발목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나는 언어를 잃었지.
이베르 디어뮈드, 그 사람이야말로 허쉬가 아는 고상한 사람에 가장 가까웠다. 조롱조로 불리어지는 '고상한 허쉬'라는 별명.
'세상 어딘가에는 밤보다 어두운 생生이 있다.'
허쉬는 수천 수만번을 읊조린 문장을 재차 곱씹는다.
가끔 허쉬는 달의 뒤편에 닿고 싶었다. 달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비밀. 미지의
알 수 없는 미지를 동경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숙명인걸까? 알 수 없는 것들을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지. 허쉬는 문득 그런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이제 이 이상 밝혀질 수 없는 미지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요, 나는 당신이 더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뒤집힌다. 그래, 어떤 삶은 물 밑에서 시작되기도 하는 법이다. 날개가 없어도 괜찮아. 아가미가 있잖아. 아가미가 없어도 괜찮아. 우리는 서로를 주축으로 살아갈테니.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뒤집힌다. 아가미가 없어도 괜찮아. 비록 떳떳치 못한 삶이라도 당신 앞에서 웃을 수 있다면 그대로 좋아. 그래요, 이안. 나는 즐거워요. 이 삶이 너무 즐거워 유실을 걱정하게 될 정도로 그렇답니다. 즐겁다고 말하면 떠나갈건가요. 아니면, 평생을 함께할건가요. 아, 부디 나의 명확하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나의 미숙함을 용서하세요. 이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당신 뿐이니.
우리는 정의로운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어때요. 당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잖아요...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당신에게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이안, 당신이 바라는 것이 있나요. 있다면 좋겠어요. 나는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요. 감히 그런 욕심을 품을 정도로는 탐욕과 가까운 것이 허쉬니까요.
내 탐욕에는 당신의 행복이 포함되어 있어요. 왜일까요. 나는 내 목숨 하나 챙기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왜 당신의 것까지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걸까요. 이게 선을 넘는 일이라면 말해주세요.
사랑은 본디 침범의 행위이다. 사랑은 서로를 침범하여 세계를 뒤섞어놓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그러니 무례한 사랑이여, 나를 마음껏 침범하소서.
허쉬는 사랑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Backside the Moon
심해와 우주는 언뜻 닮은 구석이 많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 없으며, 사람이 살기 위한 곳도 아니고 , 춥고... 그런 것들.
정말 좋아해요.
한글자 한글자 치면 튀어오르는 글자를 생각해요.
있잖아,
정말 좋아해요.
그날은 한참 연습한 종이를 버렸다. 집착적이고 부끄러운 문장으로 가득한 그런
달과 타자기와 고해.
아침 토스트
당신이 없으면 난 죽어버리고 말거예요!
의미 없이 틀어둔 TV에서는 여배우가 비극적이며 과장된 어조로 한탄했다.
정말 사랑이 없어 죽게 될까. 물론 어떤 사랑은 한없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지만 허쉬는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 사랑이 나를 죽이더라도 괜찮아.
왜 진심은 항상 무거워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쏟아져버리고 말까. 와르르 쏟아지는 것을 감당하기는 어려운데.
어떤 것은 범람하여 허쉬의 세상을 침몰시킨다. 몽중의 바다에 누운 허쉬는 모래성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어떤 것은 그런 삶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삶은 추락이 전부이기도 해.
더는 추락할 곳이 없어.
루나는 사는 일이 즐거웠다. 슬픈 일은 없었다. 아니지, 있어도 그것에 영원히 머무르려하지 않았다. 루나가 두려워하는 시간은 항상 흘러, 슬픔에도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슬픔은 사람과 같이 흐르는 것을. 왜 몰랐을까. 루나는 어렸던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지만.
아라크네는 베를 짜고 자수를 놓는 여인이었다. 아테나보다 뛰어나다며 자부했고, 실제로도 아테나를 이긴 인간. 그러나 신을 이긴 대가로 죄와 치욕을 강요받았고, 끝내 목을 매어 죽는다. 아테나는 그녀가 영원히 실을 잣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거미로 만들고, 그녀의 목에 매어있던 밧줄은 거미줄로 만들었다고 한다.
너는 왜 하나도 모르면서 전부 다 아는 걸까.
물어보는 것들은 단 한번도 막히지 않고 대답하던 너를 기억해
정작 듣고 싶은 대답들은 들려주지 않았지
그 모든 질문의 대답은 왜.
그때문인지 루나는 도시에 있으면 자주 외로워졌다. 외로움을 곱씹다가, 거짓말처럼 달콤한 것들을 물고 한참 자신을 달래는 일이 한계에 이르르면 다짜고짜 고향을 찾았다. 아무도 자신이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천진한 모습으로.
언제 돌아가도 엇비슷한 모양의 동네가 좋았다. 그러다 다른 점을 발견하면 헛헛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든게 낯설지 않아서. 그래. 멈추고 싶은 기분이 들면 그곳에서 숨을 돌렸지.
적어도 채루나는 지금껏 사는 일이 즐거웠다. 슬픈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두려워하던 것처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아, 슬픔도 엇비슷한 속도로 떠내려갔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음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러다가 끝끝내, '전부 사랑하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순간 그 생각에 본인마저 베여버리고서야.
사랑하지 말걸.
그만큼 사랑하지 말걸.
특별하게 여기지 말걸.
언젠가 흩어지고 사라지고 시들 것들을 특별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을 후회했다.
물론 들은 것은 상대밖에 없다지만 말하자면 그랬다. 긍정은 바라지도 않았던 말이었으니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장난같은 고백에 따르는 대답 역시도 성의 없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거절하는 사람이 거절당하는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담긴건 아마도 죄책감. 소중한 이를 상처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이의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도 고백도 접을 수 없었던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 자체로 괴로운 일이 또 어디있으랴.
사랑도 오래 여물면
사랑도 오래 여물면 너무 익어버린 과일처럼 떨어지게 될까.
첫문단이랑 맞물리게 써서 분명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 사람이 너이기를 바라고 싶다 나도 욕심내면 안될까 너를 욕심내게 해줘 내 사랑이 너무 익어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에. 너무 익어 썩어 사라지기 전에 네가 잡아주면 안될까.
내가 만드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겠지만 그렇다면 매일 달콤한 것들을 만들어줄게 네가 웃을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언젠가는 내가 너의 것이 될 수도 있겠지
유온은 이름이 가진 온도가 뜨뜻미지근한 온도처럼 웃었다.
무표정이 웃는 얼굴처럼 보이는
유온은 웃는 상이었다.
그 애는 자주 웃었지. 예쁘게 웃는 법은 몰라도 가만히 미소짓는 것은 그 애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않는 극단을 기다리고 있어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이가 그렇게 속삭이자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반복해서 꾸는 꿈에서는
더이상 내가 쓰는 어떤 문장도 그때처럼 아름답지 못할 것이라는 불확실한 확신이 나를 자꾸만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당신은 어째서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