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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고백의 상관관계 본문

1차/보편적인 크리스마스의 법칙 (2019년 크리스마스 단편집)

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고백의 상관관계

루카 Luka 2020. 8. 30. 03:50

그날은 겨울에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온 참이었다. 겨울에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는 두루뭉술한 요청을 구체화 하기 위해 영지 내를 돌아다니며 습도며 기온을 조사하느라 손발이 꽁꽁 얼었음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따뜻한 집안에 들어오자 잠까지 쏟아졌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 잠들 수 없다며 눈을 비비적거리던 세실리아는 그만 엉뚱한 책을 뽑아 한참이나 읽고 있던 것이다.

'현명하고 효율적인 농사를 위한 지침서'와 '실용 생태/식물학'을 꺼낸다는 것이 '직접적이고 정확한 논거에 의한 문화적 이해'를 꺼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그걸 헷갈리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어물어물 감기는 눈으로 책을 뽑으면 비슷한 위치에 있는 긴 제목의 책쯤은 헷갈리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해두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세실리아가 잘못 꺼낸 '어쩌구 문화적 이해'는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각국의 문화에 따른 미신의 유래, 뭐 그런 것들이 잔뜩 나열되어있는 책이었는데 잘못 꺼냈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알게 된 것은 그 책이 원래 본분을 잊을 만큼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이란 늘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으니 어쩌랴.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서너 장을 더 읽을 수밖에 없던 것은 책 애호가들의 특성 탓이었다. 그래, 그는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 일이 남았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현실 도피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세실리아는 마지막으로 본 문장을 곱씹으며 원래 펼치려 마음먹은 책을 펼쳤다.

'첫눈 오는 날에 고백하면 과반수의 확률로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

밑에는 구체적인 자료까지 나와 있는데 학자 된 도리로서 증명된 사실을 무시할 수 있겠나? 세실리아가 원래 업무로 복귀한 것은 그 탓이었다. 농사는 날씨가 중요하므로 각종 자료를 기반으로 첫눈 오는 날을 예측해낸다면, 앞으로 심기게 될 겨울 농작물은 물론이요, 사랑까지 쟁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완벽한 계획에 세실리아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연구에 몰두했다. 아, 이런 열정이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졸업하기 전, 한 교수를 엿먹이기 위해 불태우던 때였던가? 아니면 귀족이라며 으쓰대던 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겠다 결심한 때였던가? 언제였건 무엇이 중요할까. 어쨌든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음이 중요하지.

그리고 세실리아는 결국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첫눈이 올 날을 예측해냈다. 그건 바로 크리스마스 전날, 즉 이브!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실상 많은 일이 닥치기 전에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세실리아는 본인의 감이 이건 정답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감을 믿는 것은 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였다. 내일 미셸 도련님이 토마토를 보고 인상을 쓰실 확률과 비슷한 확률이라는 말이다. (미셸 도련님은 토마토가 끼니마다 올라왔던 한때의 악몽으로 토마토를 보면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신다.)

이제 남은 것은 안타레스와 약속을 잡는 일뿐이었다. 첫눈이 올 날짜를 예측하면서 그가 간과한 한 가지가 있다면, 보통 크리스마스에는 주방이 매우, 매우, 매우 바쁘다는 것이다. 당일 뿐만이 아니라 그 전날도, 전전날도. 그 전 일주일은 눈코 뜰 새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다만 세실리아는 주방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번번이 안타레스를 만나기 위해 돌아다녀도 그의 뒤꽁무니를 겨우 볼 정도에서 그쳐 약속은 무슨. 며칠 내내 얼굴도 보지 못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예측하면 세실리아는 학자를 관두고 점술사가 되어야 했겠지. 세실리아는 자신의 멍청함에 탄식을 쏟아냈다. 난 바보야. 진짜 바보야. 그렇다고 피곤한데 퇴근할 때 찾아갈 수도 없잖아. 어떡해….

애써 예측한 것이 하나도 필요 없게 되었다. 물론 이걸 학계에 발표하면 큰 화제가 되겠지만 그걸 원하던 것이 아니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 영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안타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닥치도록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다. 눈이 올 것이로 예측한 바로 그날까지도. 어쩔 수 없지. 내년도 있고, 다른 날도 많고. 그리고 학문적으로 말이 안 되는거 아닐까. 눈 하나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말도 안돼. 전부 다 엉터리야. 어느새인가 쌓이기 시작한 눈을 퉁명스레 바라보던 세실리아가 창고 쪽으로 향하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곤 급하게 그를 쫓아갔다. 눈을 세 번 비비고 보아도 안타레스가 분명했다.

"안타레스 씨!"

부르자 돌아보는 모양새도 역시 그였다. 눈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맞고 있는 모습에 괜한 걱정이 들어서,

"안 추워요?"

물었다가. 혹여 오늘이 가버리면 눈이 그칠까 걱정이 되어서.

"그니까, 눈이 오잖아요."
"학자님은 안 추우십니까?"

"전, 전 안 추워요."

고백은 어떻게 하는 거지? 책에서 읽었던 수많은 요령은 이미 머릿속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쉽게 얻은 지식이란 이렇게 부질없던가?

"눈이 오니까… 좋아한다고 하려고 계속 만나고 싶었는데요."

바빠 보이셔서요. 계속 찾아다녔는데.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은 고백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이 세상 모든 고백 중 가장 형편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도 고백의 한 종류라면 분명히 아주, 아주 끔찍한 고백일 테다. 이 순간이 부디 세상 어딘가 기록으로 남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도 잠시, 안타레스가 입을 떼자 세실리아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아마 칼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 좋아하십니까?"

고백이 고백처럼 들리지 않아서 다행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모른 척 하는 걸까? 아니야, 이렇게 형편없는 것도 고백으로 치기엔 무리가 있었겠지. 세실리아는 애써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곤 급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 눈 좋아해요."

크리스마스도 좋아하고, 전부 다 좋아해요. 덧붙이면서도 제가 당신도 정말 많이 좋아하거든요, 하는 말은 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으나 그렇다고 지금 이런 상황에 고백 한다면 분명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그는 안타레스가 자신을 영영 만나주지 않을까 겁이 났다. 우습게도 사랑을 전하는 것보단 지금 이 편안한 관계에서 다른 곳으로 추락하는 것이 끔찍하게 겁이 나서.

"저도 좋아합니다."

우직하니 본인에게 꼭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안타레스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세실리아는 쌓이는 눈을 발끝으로 파헤쳤다. 이 모든 행동을 곧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세실리아는 미련이 뚝뚝 흘러내리다 못해 두 손으로 쥐어짜면 한가득 쏟아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마스에도 바쁘세요?"

"저녁에는 시간이 납니다. 학자님은요?"

"전 한가해요. 음, 별다른 약속은 없으시고요?"

"…네."

"그럼, 외로운 사람들끼리 같이 있는 건 어때요?"

고백은 실패했지만, 그날 하루 친구라는 명목 아래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욕심이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 욕심이어도 좋으니 부디 수락해주기를 바랐고. 어설픈 고백을 모른 척해주었으면 했고. 그리고 또,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자신을 대해주었으면 했다.

"학자님이랑 저랑 말입니까?"

칼바람 사이에서 단 하나 온기를 가진 것이 있다면 아마 안타레스의 목소리가 아닐까. 다정하고 따스한, 배려심 넘치는, 조심스러운 것일 거라고. 물론 과학적으로 목소리가 온도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말이다. 여하간,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와인을 준비해둘게요! 케이크도 원하시면요, 꼭 준비할게요. 그니까… 와주셔야 해요?"

외롭잖아요, 혼자 있으면. 말하기 무섭게 어디선가 안타레스를 부르는 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타레스는 이만 가보아야 한다며 꼭 가겠다고. 마치 그것이 맹세라도 되는 것처럼 속삭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 약속을 이렇게나 숭고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고백은 하지 못했지만, 안타레스를 더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하루라고. 눈과 고백은 연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사랑은 눈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세실리아는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어떤 다정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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