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1차/보편적인 크리스마스의 법칙 (2019년 크리스마스 단편집) (11)
Hermitcrab's Blank Pages
율은 스산한 바람 소리에 제 옆에서 따끈하니 열기를 발산하는 이에게 달라붙었다. 폭신한 솜이불 서넛보다 수진 하나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화火의 기운을 지닌 용과 함께 산다는 것은 겨울나기에 문제가 없다는 뜻과 같아, 율은 겨울이면 그 옆에 꼭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수진님, 수진님, 하고 부르며 이거저거 이야기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것이 위화감이 들었는지 '님'자를 떼는 연습을 하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님을 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율, 본인과의 싸움으로 은근슬쩍 님을 붙이는 것도 잦았고, 수진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율을 어화둥둥 예뻐하는 것에 집중했다. 애초에 이것이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필요한 것을 사러 가까운 마을로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는지 쌀쌀한 바람 냄새..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간단하게 엘리엇 테일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이야기의 7할은 그의 삶과 연관이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터폴이던 부모님과 함께 영국 런던 인근 교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친과 모친 둘 다 그가 경찰을 꿈꾸는 것을 내심 바라지 않았으나, 이런 이야기가 항상 그러하듯 자연스레 경찰을 꿈꾸게 되었다. 이불을 덮고 혼자 자는 것이 두렵다며 부친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아이가 경찰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던 모습이나, 부친의 것인지 모친의 것인지 모를 제복을 허술하게 걸치고 환하게 웃던 모습 따위가 그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러니까 서른의 엘리엇을 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일 테지만 그 모습은 20대 초..
하루는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으로 시작해 체념으로 저물었다. 이제는 다정해진 체념 앞에서 에드워드는 곧 사랑으로만 살아가게 될 날을 상상했다. 사랑 없이는 죽음인 삶을. 그는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의 연극처럼 비현실적일 것이다. 혹은 지금과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또 그게 아니라면 어느 부분은 다르고 어느 부분은 같을 것이다. 실은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삶으로 발을 디디는 것뿐이다. 예컨대 네가 있던 세상에서 네가 없는 세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공포 앞에서 솔직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만큼은 두렵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 그는 종종 꿈을 꾸었다. 꿈을 꾸는 것은 여상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날은 달랐다. 에드워드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가..
매일이 비슷한 무게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날짜는 존재하되 무의미한 것이 되는 모양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또 내일은 오늘 같을 것이 뻔한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것을 구분할 것은 남은 식량의 양, 그런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래서 에스펠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내일은 무슨 날인지, 그 다음날은 무슨 날인지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지구에서 챙기던 기념일은 대부분 그곳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도망치듯 떠나던 때에 제대로 챙긴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런 기억을 챙겨서 왔을 리가 없다. 그러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지, 우리가 총 며칠을 살아남았는지, 그런 것을 말하는 역할은 전부 케이가 도맡는 편이었으므로 이번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억의 전반을 지구에 두고 ..
에스텔은 우찬에게 부탁한 별 조각에 보석들을 박을 요량으로 작은 홈을 파는 중이었다. 완벽한 조각에 흠이 될까 걱정도 되었으나 보석을 고정하는 건 본인이니 자신이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연장이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나뭇결을 따라 작은 홈을 만들었다. 중앙에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를 박아야지. 잘 붙으려나? 그런 것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보석 박힌 별이라면 충분히 트리 가장 높은 곳에 걸릴 만 할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의 별이라. 꼭 그것을 따러 간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애는 가장 높은 곳의 별을 따러, 에스텔은 가장 낮은 곳의 별을 따러. 이렇게 떨어졌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그런 궁금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마는 오래도..
그날은 겨울에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온 참이었다. 겨울에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는 두루뭉술한 요청을 구체화 하기 위해 영지 내를 돌아다니며 습도며 기온을 조사하느라 손발이 꽁꽁 얼었음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따뜻한 집안에 들어오자 잠까지 쏟아졌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 잠들 수 없다며 눈을 비비적거리던 세실리아는 그만 엉뚱한 책을 뽑아 한참이나 읽고 있던 것이다. '현명하고 효율적인 농사를 위한 지침서'와 '실용 생태/식물학'을 꺼낸다는 것이 '직접적이고 정확한 논거에 의한 문화적 이해'를 꺼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그걸 헷갈리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어물어물 감기는 눈으로 책을 뽑으면 비슷한 위치에 있는 긴 제목의 책쯤은 헷갈리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연서야, 난 올해도 널 정말 많이 좋아했어." 넌 어땠어? 마노가 되묻네요. 연서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이벤트가 놀랍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왜일까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장장 한 달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시작된 것은 그보다 이전임이 분명하지만,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너무 길어지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한 달 전이라고 한다면 11월 20일 즈음이겠네요.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차갑게 불었답니다. 아무리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아득하니 흐려질 정도였어요. 그러니 역시 마노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고, 연서도 비슷했지만 둘은 함께 있으면 그 추위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답니다. 바로 사랑의 힘으로요! …정말 사..
세상은 온통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레발을 치듯 사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곡이며 캐롤이 정신없이 흘러나오는 것만 해도 그랬다. 아마 평소 같았더라면 그에게도 별 의미 없을 날이었겠으나 어쩌면 다른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승현아, 뭐해?] 아마 이 정도의 카톡은 대답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해, 본론을 먼저 꺼내두기로 했다. 그러면 대답할 확률이 조금 높아졌으므로. 음, 그리고 외롭지 않은 선에서 본인을 꺼내둘 사람이 있다는 건 매우 좋은 일 아닌가? 그가 생각하기에 승현이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영화 볼래?] [나 표 생겼어.] 정확히는 생길 예정이지만. 대답조차 불분명한 일인데 표도 불분명하면 어떤가. 단홍은 승현이 모호하게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