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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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간단하게 엘리엇 테일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이야기의 7할은 그의 삶과 연관이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터폴이던 부모님과 함께 영국 런던 인근 교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친과 모친 둘 다 그가 경찰을 꿈꾸는 것을 내심 바라지 않았으나, 이런 이야기가 항상 그러하듯 자연스레 경찰을 꿈꾸게 되었다. 이불을 덮고 혼자 자는 것이 두렵다며 부친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아이가 경찰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던 모습이나, 부친의 것인지 모친의 것인지 모를 제복을 허술하게 걸치고 환하게 웃던 모습 따위가 그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러니까 서른의 엘리엇을 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일 테지만 그 모습은 20대 초반에도 분명 존재했었다.

어째서 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비극은 그날 시작되었다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말 그대로 비극은 그날을 기점으로 쏘아 올려져 어린 엘리엇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 출동했던 테일러 부부가 임무 도중 사망하고만 사건. 엘리엇은 숙부의 집에 입양되었으나 부모를 잃은 충격을 추스를 새도 없이(혹은 그 충격의 발산이라는 듯이) 더욱 필사적으로 경찰이 되고자 했다. 기왕이면 인터폴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부모님의 뒤를 잇고 싶었기 때문이지, 복수심에 눈멀었기 때문이 아님을 맹세할 수도 있었다.

20대 초반, 그가 결국 인터폴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며 불평도 불만도 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시절. 온통 꿈만 같던 시간. 그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다 보면 저와 같은 일을 겪는 아이들이 점점 더 적어지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삶에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엘리엇에게도 두 뺨이 습관처럼 상기되던 시절이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극의 서막이 테일러 부부의 사망 소식이었다면 다음은 불명예 사직이었다. 말하자면 간단했다. 조직 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가담자로 몰린 것이다. 그 당시 엘리엇은 부탁을 받은 일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살인 은폐라는 목적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돕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래, 그가 사건 자체를 알지 못했으며 이용당했다는 진술에 크게 힘이 실려 받게 된 것이 불명예 사직이었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지만 엘리엇으로서는 갑자기 나침반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는 익숙한 영국의 거리를 버틸 수 없게 된 그는 이민을 택했다. 미국은 넓으니까 아무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돼라. 그 당시의 그가 할 수 있던 합리적인 사고란 이런 종류가 전부였다. 지금껏 경찰이 되고자 공부하고 실제로도 경찰로 근무했던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엘리엇은 뉴욕 경찰 시험을 쳤다. 결과는 보나 마나 합격. 뭐랄까, 이런 상황을 두고 꿩 대신 닭이라고 하던가. 입안이 썼다. 그러나 형사가 되어 일하는 동안에는 그나마 현실을 잊을 수도 있었다. 문득 닥쳐오는 과거를 견뎌내면 이런 삶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누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던 그리 나쁜 삶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미 꿈을 잃었고 부러진 날개를 거추장스럽게 달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날지도 못하는 것이라면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과감히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엘리엇에게 크리스마스란 별다를 것 없는 휴일 중 하나였다. 어린 엘리엇이 언젠가는 혼자 남을 것을 예견한 것처럼 신탁해둔 선물이며 편지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날아온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그러나 편지와 선물은 성인이 되던 해를 마지막으로 오지 않았다. 마지막 해의 선물은 유산이었다. 이제는 덤덤해질 때도 되었을텐데 새삼 그 일이 생각나는 것은 직업적인 면에서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엘리엇은 눈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크리스티안."

고요한 서점을 가로지르는 것은 연인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당신… 크리스마스 좋아합니까?"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작은 트리라도 하나 놓을까요. 물음이지만 그 기능을 하지도 못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크리스티안과 눈을 맞췄다. 엘리엇은 종종 그의 눈을 마주 볼 때면 그가 잃은 것, 그리고 자신이 잃은 것을 상기하곤 했는데 그것이 잦아지자 이제 더는 상실을 두려워만 하지 않게 된 것도 같았다. 감히 타인의 상실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상실로 자신의 상실을 연상하는 것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래서 엘리엇은 그를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쎄요. 나쁘지 않죠. 당신은요?"

그 물음에 지금껏 말하지 않은 과거를 고백하고 싶어진 것은 왜일까. 그리 유쾌하지도 다정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는 이런 사람이었노라, 말하고 싶어진 것은 어째서일까. 그는 한때 침범을 허용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은 허용을 넘어 그를 자신의 선으로 들이고자 하는 기분이었다. 이래도 괜찮을까. 두려움에서 파생된 물음은 아니었다. 그의 비극은 이미 막을 올렸는데, 그 비극 속에서 사랑을 논해도 괜찮은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전…. 글쎄요.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보내보고 좋아하는지, 아닌지 말해드리죠."

아마 좋아하게 되겠지만. 말하지 않은 말을 표정으로 알아챈 것인지, 크리스티안은 익숙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그는 정말 예쁘게 웃는 사람이었다. 엘리엇은 그의 연인이 얼마나 아름답게 웃는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웃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어쩌면 더는 크리스마스가 지겹지 않을 것이다. 외롭거나 쓸쓸한 기억과는 멀어질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던, 그렇지 않던 분명 괜찮은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라고. 내 삶은 완전한 비극도 희극도 되지 못했으나 연극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괜찮다고.

엘리엇은 조그마한 트리를 사 오겠다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마주 웃었고, 그러자 따스한 키스가 눈처럼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간지러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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