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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보편적인 크리스마스의 법칙 (2019년 크리스마스 단편집)

이름을 불러줘!

루카 Luka 2020. 8. 30. 03:57

율은 스산한 바람 소리에 제 옆에서 따끈하니 열기를 발산하는 이에게 달라붙었다. 폭신한 솜이불 서넛보다 수진 하나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화火의 기운을 지닌 용과 함께 산다는 것은 겨울나기에 문제가 없다는 뜻과 같아, 율은 겨울이면 그 옆에 꼭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수진님, 수진님, 하고 부르며 이거저거 이야기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것이 위화감이 들었는지 '님'자를 떼는 연습을 하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님을 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율, 본인과의 싸움으로 은근슬쩍 님을 붙이는 것도 잦았고, 수진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율을 어화둥둥 예뻐하는 것에 집중했다. 애초에 이것이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필요한 것을 사러 가까운 마을로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는지 쌀쌀한 바람 냄새가 코끝을 스치기 시작한 즈음, 두터운 솜이불이며 튼튼하고 따뜻한 옷가지 몇 벌을 사러 나간 참이었다.

"올겨울은 추우려나 봐, 수진님."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물으며 무거운 솜이불 한 채를 힘주어 들어 올린 율이 묻자 상인의 눈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짝은 도련님이여?"

"그건 아닌데요?"

물음이 향한 곳은 그가 아닌 옷 몇 벌을 들고 그를 기다리던 수진이었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으나 당최 둘을 그냥 연... 어쨌든 사랑하는 사이로 보는 법이 없었다. 대체 원인이 무어람? 설마 수진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일까? 하지만 수진님을 수진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난데없이 혼란에 빠진 율은 거스름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가게를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용 님을 어떻게 감히 아무렇지도 않게 부른단 말인가? 물론 그는 존댓말을 쓰지 않은지 아주 아주 오래되었다지만, (수진을 만나기 전부터 쓰지 않으니 몇 해나 된 셈이다) 여기서 '님'이라는 글자마저 빠져버리면 그건… 어쨌든 못 할 짓인 것만 같았다. 물론, 수진은 이 일련의 고민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문제라고 인식되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래, 예컨대 이것은 인간만이 이해 가능한 고통이 아니겠는가?

율은 제가 든 솜이불 보따리를 빼앗아 든 수진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심란한 고민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가 본체로 변해 저를 태우고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집에 도착하고서도.

그리고 밝은 아침에는 심어둔 사과나무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짚을 엮어 둘러주었다. 곁에 수진이 있으니 얼어 죽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겠다마는, 혹시 모르는 일이니 열두 그루 모두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신은 영 딴 곳에 가버렸는지 수진이 땡땡하게 부풀린 볼을 하고 저를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지만.

"율아!"

"응?"

"무슨 생각 하길래 자꾸 대답도 안 해줘."

섭섭함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 모습이 귀엽기도,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 얼버부리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까 봐 그의 두 뺨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곤 오리처럼 빼죽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겨울바람에 살짝 냉엄한 빛깔을 띠었던 얼굴이 봉화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보다 빠르게 붉어졌다. 율은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지만,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너어, 하율. 자꾸 그러면 나도 복수한다고 했다?"

"별로 상관없어. 수진님이 복수를 하면 어떻게 하려구?"

여전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하자 짓궂게 웃는 모양새가 영 불안했는지 율은 슬슬 도망치려는 듯 눈치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이런 것은 인간보다 용이 뛰어난 법이었다. 그가 도망치려 달음박질하자마자 잡았다, 하고 웃는 것도 영락없이 제 또래 같아 보였고.

"수진님."

"응."

무슨 짓을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짐짓 단호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것에 다시 웃음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그는 계속 고민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내가 수진님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하율, 네가 원하는 대로. 지금처럼 불러도 좋고. 그건 왜?"

"그냥…."

시장에서 상인이 한 말도 걸렸을뿐더러 세간의 인식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본인의 행동을 좀 돌아봤다고 해야 하나…. 실상 그가 용이라고 깨닫는 순간이라곤 본체로 돌아갔을 때 한 번뿐이었으므로 거의 자각할 틈도 없긴 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수진은 그리 위엄있는 용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율의 앞에 있는 그는 그랬다는 말이다. 사랑 앞에서 종족도 나이도 성별도 없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당초 쓸모 없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터라 호칭에 관한 고민은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음, 어…. 수진님.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율은 무슨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대뜸 이야기해주겠다 나섰다. 사양할 이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는 단 한 번도 율의 이야기를 거절한 적이 없었으므로 귀 기울여 듣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오백일은 꼬박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나라에는 날아다니는 사슴을 타고 다니는 붉은 신선이 있는데 그해에 착하게 산 사람들을 찾아가서 소원을 들어주고 선물을 준대."

"붉은 신선?"

"옷이 붉다던가, 수염이 붉은 것 아닐까? 그래서 신기한 거지. 나도 올해 착하게 지냈으니까…."

"?"

"그러니까… 소원이 있어."

짐짓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꾹 쥔 율은 '수진님을 이름으로 부르게 해줘.' 하고 말하며 눈을 꾹 감았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에도 힘과 본질이 담겼다고 하지. 그러니 인간인 제가 용의 이름을 부르고자 하는 것은 아마 과분한 욕심일 것이다. 다만, 그는 가끔 거대한 존재 앞에서 제 사랑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일지를 상상하면 쓸쓸해지곤 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유일한 이가 된다면, 당신을 진아, 하고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내 흔적이 남을까. 당신의 손을 잡던 밋밋한 체온으로나마 남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율이가 부르고 싶으면 상관없어."

그게 무슨 대수라는 듯이 대꾸하는 진은 평소와 같았다. 그가 어떤 흔적을 남겨도 좋다는 것처럼 넉넉한 얼굴로 웃는 그는, 여전히 율의 진이었다. 유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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