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블랑카 로메로] 수십 수백의 새벽이 지난다면 본문
블랑카는 문장으로 엮어놓은 진심이 모래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본다. 곧 해가 뜰 것이다. 모래로 눈부신 사막에서는 초라한 문장 같은 것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 속에 블랑카는 자꾸만 밝아오는 하늘을 보았다. 진심을 다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은 안다. 간절히 바라더라도,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충분히 겪은 바가 있었고, 블랑카는 아이가 아니게 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그러니, 저 무감정한 눈동자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다면,
"…왜, 일부러, 웃는 거예요?"
왜 당신은 자꾸만 웃는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는 왜 자꾸 웃음을 짓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게 보기 좋으니까? 그게 사람을 안도하게 만드니까? 블랑카는 자신이 정한 규칙을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많이 어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을 믿기, 보여주는 모습을 믿기. 혼자가 되지 않으려 애써 세운 규칙들. 누군가 왜 규칙을 어겼냐 묻는다면 '보이잖아요. 저 눈이요. 슬플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눈이요.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저 눈이요.' 라고, 호소하듯 대답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금 물을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 않느냐고. 저 웃음에 담긴 의미가, 나는 모르겠다고. 저게 즐거워서 짓는 웃음인지, 행복해서 짓는 웃음이 맞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나는 '콜린 버트럼'이라는 사람을 깊이 알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알려달라고. 누군가에게라도 묻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규칙을 어기기로 했다. 겁 많은 블랑카로서는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일 테지만 언젠가 후회하느니 마음을 따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나. 때문에 그는 다시금 떨리는 목소리로 문장을 엮으려 애를 쓰는 것이다.
앞으로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끊으라고. 장난처럼 들리지만, 철저히 의도되었을 그 말이 어딘가에 유리 파편처럼 박혔을 테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상처는 언젠가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고독이 만든 깊은 공허는 영영 낫지 않는다. 장난처럼 이어지는 말에는 자신의 진심이 닿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러니 다시, 또다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외롭고, 콜린 씨도 외롭다는 사실을, 제가 알았잖아요."
외면하는 사실을 다시금 직시하며 또박또박 내뱉었다.
놓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도 나도 외로운 사람이라고.
그러니 덜 외롭기를 바란다고.
"벌써… 새벽이에요. 곧 해가 뜨겠죠…"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그 시간이 모이면 무언가는 분명히 변할 것이다. 블랑카는 한 번의 파도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도는 수십 수백 번을 몰아쳐 무언가를 무너트린다. 약한 파도라도 그것이 반복된다면. 잠깐의 부딪힘이 모인다면. 무언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블랑카는 제게 찾아온 파도 이후 처음으로 '좋은 파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파도들이 모여서 좋은 파도가 되는 걸까. 저를 떠나는 온기를 응시한다. 모닥불이 꺼졌구나. 새벽의 어스름한 빛 사이로, 여전히 홀로 되기를 결심한 사람처럼 고독 속에 앉은 당신을 본 블랑카는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잡아 본다.
"…가끔은, 이렇게 같이 있어요. 자주라면, 더, 좋아요. 파견이 끝난 뒤에도, 가끔은, 같이 잠에 들어요. 덜 외로운, 밤을 보내요. 가끔은, 즐거워도,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어떤 최초에 관한 이야기다. 혹은 어떤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단한 벽 뒤에 숨어버린 진심을 엿본 블랑카는 끝없이 그 벽을 두드리고, 또 두드릴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약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라도 수십 수백 번을 부딪히는 파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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