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북쪽 탑의 마법사와 남쪽의 기사 본문
지금보다 먼 옛날, 신화시대가 막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제국이 세워지고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거나 명확히 시대를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한 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북쪽, 하얀 눈으로 뒤덮여 걸어온 길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설원 한 가운데에 새하얀 돌로 쌓아 올린 탑이 있었다. 탑에는 오래전부터 마법사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일대의 눈을 내리거나 거두며 산짐승들과 함께 지내거나 간혹 찾아오는 이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도 했다. ‘간혹’이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흔한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그가 사는 탑은 꼭꼭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간절한 사람만이 탑을 찾는 것을 허락받았다. 마법사 역시 본질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문지르면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램프처럼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순전히 마법사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게다가 마법사는 몹시 게으른 성격으로, 눈을 내리거나 그칠 때, 산짐승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면 탑 밖으로 걸음 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마법사가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이 햇수로 3년이 되자 그는 자신이 잊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내심 기뻐했으나 기어코 누군가는 마법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건 남부 출신의 한 기사였다!
그 기사는 지금은 사라진 남부의 한 백작령에 충성을 맹세했던 자로, 나고 자라기를 그곳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벗어날 리 없다고 믿어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생전 본 적 없던 마물이 백작일가를 몰살시킨 뒤 그들을 지키던 마지막 기사에게 저주를 내리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로부터 3년이 지나면 내가 내린 저주로 인해 너는 죽을 것이다.’
저주에 걸린 기사는 말 한 필과 함께 텅 빈 영지 바깥을 지나 근처 영지로 향했고, 상처를 입은 기사를 발견한 선량한 주민들이 그를 마을 의사에게 데려다주었다. 주민들은 돌아가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 근처에 마물이 나타난 거냐, 어디서 온 것이냐 물었지만 아무도 기사가 살던 영지를 알지 못했으며 기사가 만난 말하는 마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결론이 났다. 기사는 참담한 마음으로 풍경을 둘러보며 기억하는 방향으로 아무리 걸어도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풍경은 이전과 같지만 아무도 그가 태어난 곳을 알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검은 말 한 필과 빛바랜 맹세뿐인 기사는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과 현실을 뒤로하고 그저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가끔은 말에 올라타 조금 달리다가 연고도 없는 마을을 만났다. 여비가 필요하면 도착한 마을에서 힘이 필요한 일을 해주고 삯이나 음식을 받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렇게 몇 개의 마을을 지났을까? 어느새 수도 근방의 마을을 지나게 된 기사는 그곳에서 여비를 충당하기로 했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곳에서의 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숲의 마법사를 찾으면 소원을 이뤄준다나 뭐라나. ‘마법사’자체는 그때에도 존재했지만 그 마법사는 조금 더 특별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같은 인간보다는 신화 시대의 흔적 그 자체와 같은 것…
마법사를 만난 이후 기사의 행보는 지역과 판본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나, 카렌이 어린 시절 접한 판본에서는 저주와 관련된 기록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잊혀진 유적을 찾아 길을 떠난다. 마법사가 협력한 이유도 제각각 다르지만 대체로 마법을 위해서 시작한 여정이지만 기사와 가까워지며 진심으로 그를 연민하고, 그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유적의 마물을 물리치고서 얻은 마법들로 해주를 시도하기 위해 탑으로 돌아왔으나기사에게 남은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어 어느새 기사가 잃은 여름이 돌아온다.
지킬 것도, 지켜야 할 이유도 잃은 계절이 돌아와서...
기사는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는 틀렸다고, 괜찮다고 말한다.
마법사는 가장 위대한 마법사인 자신을 찾아와놓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며 성을 냈다. 친구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분했던 것이다.
기사가 셈하기를, 꼭 일주일 남은 시점...
마법사는 저주의 정체를 밝히는 일조차 성공하지 못한 채로 친구의 곁을 지킨다. 기사는 언제든 탑을 박차고 나가 무엇과도 싸울 수 있을 만큼 건강했지만 기사도 마법사도 알고 저주가 그를 좀먹고 죽음을 향해 떠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마법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기로 한다. 북부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여름을 무시하고 오로지 단 한 사람, 그의 기사를 위해 눈을 내리기로 한다.
그 해 여름에는 눈이 내렸다. 드물게 햇살이 따사로운 날, 둘은 탑을 등지고 서서 한참 눈을 맞는다. 눈은 사람에게 닿기 무섭게 녹아내렸고, 기사의 머리칼과 콧잔등, 닳아 반질거리는 갑옷에 닿아 물방울이 되어 맺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기가 맺히고 떨어지느라 엉망이 된 머리칼도 정리하지 않은 채로 기사는 마법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웃는 방식은 아니었다.
나는 어쩌면 그 날 남부에서 생을 마감했어야 했던 것 같다고. 그러나 이 저주라는 것이 나를 북부로 이끌어 평생 만날 일 없던 사람을 만나게 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마법사를 만나서 기쁘다고.
그러니 이제 후회없으리.
친애하는 나의 마법사.
부디 나와 함께한 날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해다오.
언젠가 우리 함께한 날을 떠올리며 행복했다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네…
작별 인사를 건넨 기사의 몸이 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지자 넘어지듯 그의 갑옷을 향해 뛰어간 마법사는 오래오래 그 죽음을 애도하겠노라 맹세한다. 그리고 동화는 여기서 끝난다.
이후 마법사가 기사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기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알려진 영지로 향한 뒤, 마물을 퇴치하는 후일담이 있으나 이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마물을 퇴치해도 그의 기사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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