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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홍]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본문

1차/현대 한국 배경

[여담홍]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루카 Luka 2024. 11. 18. 00:50

2020.03.09 최초 작성

2024.11.18 리뉴얼

 

Inspired by 심규선,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원곡 재주소년)

 

 

 

1.
그의 사랑은 늘 다른 곳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그 모습을 숱하게 바라보면서 단 한 번도 그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사랑은 죄가 없었으므로. 그의 사랑은 어떤 죄도 없었으므로. 가끔 속이 옥죄어 올 때면 눈을 감고 숫자를 셌다. 아찔하게 세상이 멀어지는 현기증을 뒤로하고 심호흡하며, 마치 난생처음 무대에 오르는 아마추어 배우처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꼭 서른을 세고 나면 이 풍경이 달라져 있을 것만 같다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통은 오로지 자신의 몫. 그러니 그저 감내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얻은 병은 먼 타국에서도 낫지 않았고, 제가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와도 낫지 않았다. 짐승이 죽음을 알듯 이 통증은 사랑과 함께 영원한 것을 예감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순간은 괜찮고, 어떤 순간은 그렇지 못했다. 습관처럼 손가락 마디마디를 주무르듯 매만지며 이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면…

2.
감은 눈 사이로 눈 부신 빛이 쏟아진다. 무대의 조명이다. 그것은 익히 받아온 빛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의 것은 아니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종장. 그래, 여담홍의 것이다. 그의 사랑은 무대에 발을 디디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웃고, 노래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눈물 흘렸다. 무대 아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이별했다. 그가 모르는 수많은 여담홍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언뜻 사랑의 연유에 손이 닿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무대 위의 담홍이 사랑을 노래할 때면.

무대 아래의 그에게는 웃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웃으며,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사랑을 말하는 순간을 지켜볼 때면 지독한 현기증이 닥치는 기분이었다. 실재하지 않음을 되뇌며 타는 속을 애써 달래는 것이 전부였다. 무대 위에 선 담홍은 본인이되 본인이 아니고, 사랑을 속삭이는 대상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저 사랑이 향하는 방향에는 무엇도 없다고. 마치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조금 나았다.

무대 위에선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붉은 전화박스에 기대어 설레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든다. 발끝이 기분 좋은 초조함으로 연신 땅을 두드리지만, 그것이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을 입에 넣은 아이처럼 함빡 웃은 남자는 객관적으로 '사랑스럽다'는 평이 어울리는 얼굴이다. 둥근 눈매, 너그럽게 미소하는 입매. 어떤 끔찍한 일도 겪지 않았으며 사랑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사랑하기 쉬운 얼굴. 쉽게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는 무해함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여담홍도 저런 것을 사랑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도 재앙과 같은 것을 불러온다. 그는 불쾌하게 뛰는 심장에 입을 단단히 다문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사랑은 정말이지 죄라곤 없이 무고하기만 했다.

3.
사랑에 뒤따르는 것은 오로지 고통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에 취하면 아주 작은 것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첨예한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과도 닮았다. 이것이 해로운 것과 유사하지 않다면 거짓이고 기만이겠지. 그는 시계 아래에 가려진 손목을 가만 눌러본다.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인 박자로 뛰어대는 것이 있다. 그 이전에는 존재를 실감할 필요도 없던 것. 과분한 존재감을 가진.

4.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랑도 어쩌면 그래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흐르는 것이 일방향이라는 것이 아닐까.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은 없다. 그것은 지구에 사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법칙과 같았으나 상상은 언제나 자유가 아닌가. 그 역시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사랑이 제 손을 잡고 사랑한다 속삭이는 것과 같은 것. 사랑의 마지막, 그 종결 앞에서 한쪽 팔로는 허리를 지탱하고, 한 손은 마주 잡은 채, 심장 소리를 박자 삼아 왈츠를 추는 것.

그는 평범하게 살아왔으니 어떤 화려한 무대도 필요 없다.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대 아래의 삶. 무대를 알기 이전에는 이곳이 무대 아래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사랑이 무대를 사랑하고, 그 위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역시 기꺼이 무대로 올라가 배우가 되어 보이리라. 그의 인생과는 하등 관계없는 무대지만, 그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대와 가장 밝게 빛나는 조명, 매끄러운 유리구두와 보석으로 치장된 드레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안겨주리. 그리고 오직 단 한 번의 춤을 청할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이 아닌 여담홍의 사랑. 그 끝에서 함께 춤을 춘다면 그것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테다. 그는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이번에는 서른, 스물아홉, 스물여덟…

빙그르르, 그들이 가볍게 턴하면 궤적을 따라 푸르게 나부끼는 드레스를 상상해 본다.

…셋,

자신에게 향할 리 없는 사랑으로 미소 짓는 담홍을 바라보고.

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감히 입에 담고.

하나.

감히 입을 맞추려 고개를 기울이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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