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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환통 본문

2차/솔라 레메게톤

백야, 환통

루카 Luka 2020. 7. 5. 18:39

2019.10.22

아가레스X솔라


아가레스는 오만처럼 높다란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까. 그날은 역천사 아가레스가 잃은 것을 지옥의 동부 공작 아가레스가 삼킨 날이었는데. 그러니 꿈을 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마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구태여 들쑤셔야만 하는 종류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저 그대로,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형벌 아래에서 짓눌리는 것이 아버지, 그분의 뜻이라면 그리하리라. 같은 장면을 수도 없이 바라보며 생각한 것은 그랬다. 아가레스는 그가 택한 명예의 길이 이끈 현재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여태껏 그리 해왔던 것처럼, 지난하게 세월을 끌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건 견뎌야 하는 모든 것 중 가장 쉬웠다. 기실 '견딘다'는 선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에 가까우니 형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랬다.

끝내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고 '배덕을 짊어진 자'를 멸하러 발걸음 하여, 날개가 뽑히고 차가운 돌벽에 박제처럼 걸려 죽어가던 순간을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에게 이건 꿈보다는 사실, 사실보다는 기억에 가까운 것이었을 테니. 꿈이라면 자신을 멸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 한 갈래에서 시작된 이는 아니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실현 불가능한 일이 생겨야 꿈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가엾게 여기었던 목소리가 있다. 교활하나 합리적이었던, 한때 그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이의 것이었다. 무지한 것도 어리석다 말할 수 있다면. 완전함을 지니고 이 땅에 내려온 자로서 감히 무지한 것도 어리석다 말할 수 있다면 그때의 증거처럼 선명한 이가. 허락되지 않은 것에 손을 뻗어 엿본 미래….

"오, 저런. 아가레스 님. 끝내 어둡고 축축한 지하에 홀로 잠들어서……. 비로소 벌을 받게 되십니까?

그러니까, 당신에게 그게 어째서 벌이죠?"

겨우 홀로 잠드는 것이 벌일 리 없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징벌의 시작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높은 곳의 아버지께서 제게 내린 새로운 사명일 따름이었다.

현재의 것이 아닌 감정이라 하더라도 기억은 선명한 법이다. 그게 망각이 허락되지 않은 자의 것이라면 조금 더 진짜처럼 보일 테지. 난폭한 슬픔이 한 차례 더 몰아치기 전, 더는 역천사일 수 없는 존재는 눈을 감았다.

암전.
익숙한 어둠이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자그마한 계집 하나가 감히 그를 소환했다는 것이 흥미롭고 괘씸할 따름이다. 괘씸했던가? 이대로 침잠했더라면 무뎌질 수도 있던 것들을 끌어올린 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던가? 꿈이지만 선명하고 갑작스러운 꽃향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옛 형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 도처에 가득했으나, 문솔라가 미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연유도 없이 사랑했다. 어떤 마땅한 순간도 없이, 그저 한순간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아득하게 깊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날개를 가진 자로서 추락은 달가울 수 없는 단어인데도 그것이 퍽 기껍기까지 했다. 이러한 추락이라면 몇 번을 겪어도 나쁘지 않겠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 추락의 끝에 작고 어린, 그토록 귀애하는 빛이 있다면. 이토록 상냥한 추락이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
죽음 앞에서도 기이하게 초연하던 문솔라. 먼저 손을 놓아버리던 매정한, 문솔라. 그리고 끝끝내에는 구원을 이루어낸 성녀 '문솔라', 꿈에는 그가 아는 모든 문솔라가 스쳤다. 머리가 쨍하도록 강렬한 기억들이 스쳤다. 봄날은 한철이지만 기억은 영원할 것을 안다. 끌고 가야 할 세월이 두 손으로 꼽지 못할 만큼 늘었으나 무겁지 않았다.

아니, 무겁지 않다면 거짓이다. 가볍지 않아 좋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잊을 수 없으리라 확신했던 탓일 테다. 문솔라가 본인의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것처럼 존재 역시 가벼웠노라면 언젠가 그것을 서럽게 여기어, 손에 꼽던 후회가 그러지도 못할 만큼 늘어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사건이 현재에 가까워질 수록 꿈은 옅었다. 얕은 물로 쓸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문솔라'가 새 시대를 알리는 종을 울리자 깊은 물에서 떠오르듯 아가레스는 꿈에서 깨어났다.

비로소 뭍이었다.

#
아가레스는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순식간에 말려버리며 폐허의 한구석에 기대어 앉았다.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그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 꿈의 편린이나마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일 테다. 미련, 그래. 그보다는 다정했으나 어리석게도 라파엘을 향하던 난폭한 미련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와 무의미하게도 고귀한 자와 위대한 마법사의 몰락은 실재했다. 어둠은 손에 만져질 것처럼 가깝고 빛은 꿈보다 얕아서, 그래서…

문솔라.

목소리도, 향기도, 작은 손발과 온기, 동그란 머리, 퉁명스러운 얼굴, 그리고 못내 다정한 빛으로 일그러지던 눈동자, 서툰 미소까지 모두 생생했으나 그 이름의 주인은 없었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구원을 담은 꿈은 자신의 것이 아닌 높은 곳의 아버지, 그분 꿈의 한 자락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꿈속의 모든 것이 존재한 적도 없이 희미하고 멀었으나 이 현실 역시 아득하고 멀기 그지없어 이것이 꿈인지, 저것이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렵다는 것은 아마 이 현실이 막막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도, 애정도, 감정도 모르던 부동심의 소녀가 자라나던 시간이 존재한 적이 없음에…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가레스는 감정의 이름을 모를 때면 문솔라가 짓던 표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왈칵 토해내듯 구겨진 얼굴로 환통을 더듬으며 진정한 징벌은 이로써 시작되는 것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홀로 잠들어 벌을 받게 되냐 묻던, 그것이 어째서 벌이냐 의문을 표하던 그대로, 그것은 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잠드는 것은 그렇지 않았을 테지만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형벌이었다고.

아가레스는 언젠가처럼 입속으로 읊조렸다. 입속에서 맴돌다 사라질 기도였으나 그것이 제 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간절했음은 자명했다.

"차라리… 내게 빛도 없이 온전한 어둠을 주십시오, 아버지."

그 온전한 어둠 속에서 눈먼 자처럼 아버지, 당신의 사명을 따를 테니 부디 그리 하십시오….


눈물도 아닌 것이 눈물인 척 그의 볼을 타고 흘렀다. 비처럼 그치지도 않고 뺨을 적시는 것이 얄궂기만 했다. 고결하게 태어나 가여운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제품에 밀어 넣고 정을 주고 사랑하게 되자, 가엾게 여기게 되자 모래보다 고운 분진으로 흩어 그러모을 수도 없게 하십니까. 빌어먹게도 그 순간 아가레스는 어떤 것을 후회하고 원망했다. 그 둘을 구분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뿌리를 가진 것이었으나 방향은 분명했다. 꿈이거나 과거일 곳에 존재할.

#
해가 뜬 적이 없으니 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존재한 적도 없는 문솔라를 향한 감정 역시 없어야 마땅했다. 사랑은 먼 옛날 유적처럼 개념만 남아 허공을 부유해야 했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아가레스의 온몸을 들끓는 환통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가레스는…
한때 고귀했던 이름의 주인은…

아직도 형벌의 한 가운데에 홀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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