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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The Tower] 아가레스 본문

2차/솔라 레메게톤

[합작] [The Tower] 아가레스

루카 Luka 2021. 2. 14. 16:00

아가레스는 말을 잃은 솔로몬의 어린 후궁을 바라보았다. 솔로몬은 늘 이런저런 이유로 후궁을 들이곤 했으니, 아마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이리라. 그러니 아가레스는 그녀에게 눈을 오래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으나 이러한 이야기의 시작이 그렇듯 그러지 못했다. 종종 솔로몬이나 바사고를 바라보며, 혹은 바깥의 먼 풍경을 바라보며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이름과 풍경을 연상하는 순간,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일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일어나곤 하니, 이름 모를 감정이 때도 모르게 깃드는 것 역시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아가레스는 구태여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이 주도한 사태일지도 모른다. 사랑스럽고 가엾은 것들은 결국 늘 상처를 남기고 떠나버리곤 했으므로. 그 가엾은 것들은 너무나 쉽게 부재하고 사라지고 스러지고 끝내는 불타버리지 않았나. 마음에 들이고 나면 언젠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가레스는, 금지된 말을 인간들에게 가르쳤던 배덕자는 그녀가 곁에 없을 때도 무너진 탑을 생각했다. 그 탑에서 추락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들을. 말을 잃은 소녀, '솔라' 역시 그러한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을까. 여간한 물건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 애초에 영혼체로 이곳까지 흘러온 것만 보아도 그랬다. 기원을 파헤치기 어려운 기운을 온몸에 휘감고 그 가느다란 몸으로 걷는 것만 보아도, 도서관에 종일 박혀 무언가를 그리 간절하게 찾아댈 때도, 뒤늦게 알아버린 달큰함에 취해 옅게 웃음 짓는 것도 그러했다. 꼭 웃는 법을 이제야 알게 된 어린 인간처럼 웃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그리워했고, 그리워함에 서러워졌고, 서러움은 차마 묻지 못한 수많은 질문에 맺혔다. 왜 하필 너여야 했느냐고, 나를 단죄하는 것은 다른 이가 행했어도 되는 일이 아니었냐고. 배덕자를 멸할 이는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형제라 칭하는 네놈이어야 했느냐고. 정녕 네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하였냐고. 오래된 이야기를 솔로몬의 후궁에게 줄줄 읊어댄 것은 고의는 아니었다. 다만 바사고를 보고, 솔로몬의 일을 이해하는 어딘가 묘한 소녀. 아마도 말을 할 수 있었거들랑, 조곤조곤 어떤 것이든 이야기했을 입으로 꼭 저 같은 간식거리를 우물거리는 '솔라'에게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 작은 소녀가 무엇이라고. 정녕 무엇이라고. 자칫 잘못 힘을 주면 부러지는 꽃가지처럼 애지중지했다. 여태껏 보았던 인간보다 하늘하늘 나부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영혼체라는 특성 때문에 생긴 성질일지라도, 아가레스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저 사랑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였다고. 그리하여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었노라, 읊조리는 것이다. 제 손바닥에 또박또박 적어내리던 단어와 음절을, 소리 없이 불리는 이름과, 봄의 산들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를. 고요하게 잠든 얼굴을. 유난히 작고 둥근 어깨와 갈색 머리카락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혼체이니, 영원과도 같은 삶에서 서로를 잃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필멸할 것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상실이 가져오는 두려움은 정도와 형태의 차이만 있지, 무언가를 가엾어하는 이들에겐 필연적인 일이었다. 아가레스는, 훗날 돌아오지 못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일이 이제는 지긋지긋했으므로….

기실 그런 것은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사랑하는 법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그에게 문솔라는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법을 상기 시켜 주지 않았던가.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아가레스는 문솔라를 사랑했다.

기록에도 남지 않은 아주 먼 옛날. 그가 가엾게 여긴 인간들이 쌓은 탑이 무너지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름도 없는 들꽃을 하나둘 쌓아 올린 자그마한 탑이 서늘한 바람에 흩어지고서도 오랜 시간을.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긴 어둠 속에서. 꼭 언젠가를 위한 마지막 안배, 혹은 이별을 위한 유예임은 영영 모르는 채로 마냥 사랑했다.

이름 없는 시대를 연 '문솔라'가 찰나의 시간을 스칠 것을 알면서도 가슴에 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이 언젠가 슬퍼할 상실을 두려워했고, 제 안위보다 더 걱정하던 그 순간에 이미 깨닫게 된 어렴풋한 사랑. 필멸할 것을 사랑한 최후가 어떠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만 어떤 것은 순간이기에 아름답고, 어떤 이들은 순간으로 영원을 살아가지 않던가. 그러니 아가레스는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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