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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C. 로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 Luka 2021. 9. 30. 22:49

ㄱㅁ님 커미션 작업 (자캐로 커미션을 받은 놈이 있다? 삐슝빠슝-!)

 

 


 

 

전쟁 이후에도 어떤 삶은 계속된다.

 

메이는 그것이 퍽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게 진열장의 먼지를 털었다. 민트색과 흰색으로 꾸며진 아기자기한 가게는 늘 달큰하고 고소한 향기가 감돌고는 했는데, 전쟁 이후에도 그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호그스미드 거리 대부분은 아마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한 것은 사람이다. 명백한 사실을 짚어내며 메이는 안쪽 창문을 느리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해가 진다. 매정하게. 이 하루에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아마 전쟁이 끝나던 날도 비슷한 해가 뜨고 졌을 것이다. 그날 함께한 사람들의 얼굴은 불필요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풍경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어렵지 않나, 싶으면서도. 그날 단 한 번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음에, 혹은 그로 인해 연상되는 것들에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이미 끝났고, 거리는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어둠의 마법사 대부분은 아즈카반으로 이송되었거나 전쟁 중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작거나 크게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나, 메이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 지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생존자라고 말하기에는 그가 짊어졌던 것이 무거웠고, 영웅이라 말하기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영웅으로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메이는 자신이 살인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메이가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어둠의 마법사이기도 했고, 한때는 얼굴을 마주 보고 같은 곳에서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거나 서로를 걱정하고 염려하던 이들이기도 했다. 트라이 위저드나 마법사 결투와는 결이 달랐다. 그곳에 명예란 없었고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뿐이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절박했다. 아마 그곳에 있는 대부분이 서로의 상태를 알아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므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외면하고 고개 돌리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메이는 그 전장에 서서 지팡이를 들었다. 망설임은 순간으로, 가차 없이 그들을 향해 겨누었고, 아끼던 많은 이들을 잃었다. 내심 나도 살고 싶었던 걸까. 대의를 명분 삼아 내 목숨을 부지하려는 알량한 속셈은 아니었을까. 전쟁이 끝나고서도 그런 의심은 걸러지지 않는 미세한 입자가 되어 천천히 쌓이고 또 쌓였다. 전장의 어스름한 노을. 그때 갇혀버린 사람들을 상상하면 그 모든 것이 단단한 돌처럼 굳어 숨통을 틀어막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메이는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라고 믿었다. 그는 살아있고, 숨이 꺼지지 않은 자의 숙명대로 전쟁 이후에도 계속해서 흘러가는 삶 위를 헤엄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깐, 정말 헤엄을 치고 있나? 아무렴. 가라앉지 않으면 그것도 헤엄이고 말고. 얼마나 엉터리로 팔다리를 움직이던 가라앉지 않으니까. 살아있는 것에 기꺼워하지 못할망정 그는 아직도 그 전장의 노을을 상상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풍경들. 익숙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세상과 찰나의 순간 스친 낯선 표정. 돌아오지 않는 사람.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사람. 공격적인 마법이 터지는 굉음. 그와 닮은 폭죽 소리… 눈앞에서 거대한 별이 번쩍, 터져나가는 순간 발밑이 푹 꺼져버리는 듯한 현기증.

 

툭.

 

추락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별안간 세상이 흔들리며 자그마한 사탕이 가득 담긴 유리병이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사탕과 유리 조각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이고 바닥의 타일이 어긋났다. 천장의 전등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처박혔다. 부서지고 낙하하는 것들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내려보면 그의 손에는 창을 닦던 마른 천이 아닌 지팡이가 들려있다. 밝은 빛을 띠는 지팡이는 꽤 오랫동안 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익숙한 모양이다. 부드러운 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간 그림 같은 지팡이. 투박한 모양새가 상상하던 마법 지팡이와 같아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던. 그렇기에 전쟁 이후 유년기의 보물들과 함께 저 깊이 묻어두어야만 했던 기억.

 

'메이, 넌 이 자리에 동창회가 아니라 기사단으로서 나온거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널 믿었는데…'

 

'…메이, 저는 살고 싶어요.'

 

한때는 어른이 되기를 바랐으면서 이제 와 영원히 아이였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다. 메이는 모두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행복했기에 괴로웠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덜 슬펐을까. 한명 한명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저 익숙한 사람 중 하나였다면. 그토록 모두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나를 아껴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괜찮았을까?

 

그는 무릎을 굽혀 차가운 땅에 몸을 숙인 채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이것은 유년과의 작별. 아니, 작별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몸짓이다. 지팡이는 차가운 땅에 홀로 남는다. 저 멀리 해가 지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한때는 분명 그러했으나, 이제는 오로지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풍경. 이윽고 지평선 너머로 아주 조금의 빛마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숨을 죽이고 잃어버린 이름들을 떠올렸다. 숨길 수 없는 애정으로 부르던 이름들. 그러나 더는 그와 가깝지 않은 이름. 이 모든 이름을 떠올리고서야 메이는 수면 위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오랫동안 참은 숨을 급히 뱉어내며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새 밤이다. 떨어트린 마른 천을 주우며 바라본 하늘의 달은 한입 베어 문 디저트를 닮았다. 어쩌면 누군가의 웃는 입매를 닮은 듯 보이기도 한다. 메이는 그 호선을 따라 미소지어보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겨우 한숨을 내쉬며 가게 문을 닫는다. 오늘도 누군가를 남겨둔 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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