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허드슨, 소피아] -1 본문
…정님? 탐정님? 일어나세요.
네, 네, 탐정님. 저예요. 탐정님의 믿음직한 조수 소피아요!
주무시고 계셔서 깨워드렸어요.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렇게 맥을 못 추고 주무세요? 밤새 악몽에라도 시달리신 것처럼! 그나저나 곧 필립 씨가 오실 때라서…
…표정이 좋지 않으세요, 탐정님. 네? 제가 누구냐고요? 설마 절 잊으신 건가요? 오, 이럴 수가. 제 월급과 탐정님과 제 어머니를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 사기꾼은 아녜요. 오래전에 했던 일이지만 다시 소개 드리자면 저는 탐정님이 고용하신 조수, 소피아 애버리라고 해요. 탐정님은 저를 '소피아'라고 부르곤 하셨죠. 편하게 불러주세요. 소피아, 애버리 양, 혹은 소피…
아, '애버리 양'은 조지 테일러 씨가 생각나네요. '조지 테일러 씨'가 누구냐면요, 혹시 기억하실까 모르겠는데, 변호사세요! 돈을 좀 좋아하시고 까칠하시고, 끝내주는 독설가로 유명하지만 그렇게 나쁘기만 한 분은 아니…….
음, 철회할게요. 나중에 직접 만나보시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혹시 알아요? 그분 독설에 기억이 돌아올지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설명하다 보니 길어져서 그만. 기억을 되찾으시기를 기다리기엔 스케줄이 너무 많이 밀려버렸는걸요! 보세요!
전화기가 울린다.
아, 세상에. 말하기 무섭게 전화까지 오네요. 하필 이런 때에.
달칵, 전화 받는 소리.
네, 여보세요. 허드슨 클락의 탐정 사무소입니다. 저는 조수고요. 탐정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용건 전해드릴까요? 네, 네. 네. 그럼 내일 세시에 방문하시겠어요? 네, 네-
보셨죠? 이렇게 인망 높은 탐정님이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억이 마지막이세요? 네? 그렇게 오래전이요? 성공한 미래를 엿보시는 기분이겠네요! 물론 기억을 잃은 건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낫잖아요. 일단, 최대한 탐정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주세요. 다음은 살인 사건 수사 의뢰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다고 하셔도 가야 하지만요. 일단은 여쭤봤어요. 제가 모든 일에 대리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사람들은 탐정님을 원하는걸요. 자자, 거울도 한번 보시고. 코트도 입어주세요. 살인 사건 현장 조사 이후에는 경찰 쪽에 보고서를 한 장 써야 하고, 그다음에는 샐리 할머니네 고양이 찾는 의뢰가, 그 다음에는 이 근방 실종 사건 수사가 있어요. 그리고 방금 온 전화는….
네, 네. 우선 사건 현장으로 가자는 말씀이시죠? 좋아요. 위치는 '콜린스 금융 상담소'가 있는 사거리 앞이에요. 그나저나 정말 대담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거리 한복판에서 살인을 저지를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그곳이 범행 장소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차 문 여는 소리
잠깐, 탐정님! 혹시 운전하는 법은 기억하고 계시나요? 물론 저도 운전은 할 수 있지만, 흠이라도 내면 안 되니까요. 기억하신다구요? 잊은 건 저랑, 요 근래의 사건들 뿐이라구요? 아, 신이시여. 정말 너무하시기도 하지.
차 시동 거는 소리. 시트에서 약간의 먼지가 날린다.
휴. 오늘은 차도 청소해야겠어요. 먼지 봐!
재채기 소리
하하, 재채기 소리는 여전하…
소피아의 재채기 소리가 연달아 세 번.
…여전하시네요. 기억을 잃는다고 재채기 소리가 특별히 변하는 법은 없겠지만요.
코훌쩍이는 소리 약간.
제가 기억 안 난다고 하신 것치고는 저랑 그렇게 어색하지 않으신데요? 아, 하긴 저희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기억나세요? 아니, 잊어버리셨지. 방금 질문은 없던 거로 해요.
말해달라고요? 음, 좋아요.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저는 일단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가출했거든요.
숨 삼키는 소리. 차체가 조금 흔들린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모양이다.
처음 들으실 때도 꼭 그런 표정을 지으셨는데! 어쩜,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계속 이야 하자면, 그렇게 가출하고 나니 돈도 숙소도 없을 거 아녜요? 곤란해서 마냥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탐정님이 안경 없이 곤란해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여쭤봤죠.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말이에요.
탐정님은 안경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때야 몰랐으니까요. 안경을 글쎄, 다람쥐가 물어 가버렸다고 말씀하시는데, 저 위쪽 나무에서 다람쥐가 안경을 갉작대고 있는 거예요. 정말 희한하죠. 맛도 없는 걸 뭘 먹겠다고. 다람쥐들도 먹고 살기 힘겨운가 봐요. 차라리 탐정님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 바를 하나 가져가지…
그걸 어떻게 아냐구요? 저는 조수니까요! 탐정님의 유능한 조수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저희가 어떻게 만났는지 들려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안경을 제가 나무를 타서 다람쥐에게서 탈취해 돌려드렸죠. 탐정님은 정말 정말 감격한 얼굴로,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사무소에서 조수 일을 하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저야 횡재였던 거죠.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인가 봐요. 제가 착하다고 단언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요.
차가 부드럽게 멈춘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 콜린스 금융 상담소 앞에 모인 경찰들. 인파로 북적인다.
사람도 엄청 많네요. 다들 비위도 좋지… 탐정님! 당당해지세요! 이곳에서 정식으로 수사 의뢰를 받아 온 당당한 탐정이시니까요! '허드슨입니다.'만 하셔도 다들 길을 비켜…
…아이, 저기요! 사람 좀 지나갈게요! 허드슨 클락 탐정 사무소에서 나왔어요!
…
…보통은 비켜주시는데, 다들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요.
인파가 모여있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부분 탄식이다.
휴, 고생하셨어요. 이제 시작이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여긴가봐요. 혈흔이 시작된 장소는. 정말 저만 깔끔하게 잊어버리신 것처럼 평소랑 다르지 않으신데요? 대체 왜 저만 잊어버리셨지? 저번 그 일 때문인가?
저번 그 일이 뭐냐고요? 아, 그건요… 실종된 사람을 찾으러 갔던 일인데. 이게… 그렇게 좋게 끝나진 않았어요. …모든 일이 좋게 끝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해도 괜찮을까요?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시거나, 아니면 변호사님을 만나시게 되면 그때 여쭤보세요. 그게 조금 더 정확할 거예요. 저는 보다시피 말주변도 없고…
네? 아니에요. 저를 조수 삼은 건 괜찮은 선택이었을 거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그 정도는 아닐걸요. 저는 그냥….
…그래도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탐정님이랑 일하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 아마도 경관이다.
시체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됐다고요? 말도 안 돼! 어떻게 죽은 사람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어서 빨리 가봐요, 탐정님!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바쁘긴 해도 그 정도 시간은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요. 탐정님이 절 고용하셨잖아요. 자, 빨리 가요! 오늘도 세상은 탐정을 필요로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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