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순례자를 위한 길 본문
새들은 자꾸 북쪽으로 날았다. 북쪽은 그저 찬 바람만 부는 황무지로만 배웠는데도 그랬다. 나이 든 사람들은 새가 북쪽으로 향하는 이유가 그곳이 신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라 믿었으나 나는 신이 공평한 거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순적이게 느껴졌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신과 가장 가까운 이들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착실한 신도이며 그의 가장 총애받는 자식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배되었는가?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나는 더 이상 새를 믿지 않았다. 내 장례에 사용될 새를 풀어달라 편지를 해도 그것은 권한 밖이라는 성의없는 답신만 돌아올 뿐이었다. 미신에 매달리는 이 땅이 지긋지긋해질 무렵, 나는 당신을 만났다. 당신은 자신을 북쪽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이름조차 낯선 발음을 가진 이방인이었으나 출신지를 이유로 선뜻 잠자리를 내어주었다. 이해받을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품고서.
그 희망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북쪽의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아침 맛있었어요, 같은 평범한 대화를 할 뿐이었다. 나는 북쪽이 궁금해 아이처럼 안달을 내었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을 정도로. 그것이 뒤늦게 부끄러워져 애써 뻔뻔한 체를 했다.
- 내가 살던 곳이 궁금해요?
당신은 나즈막한 소리로 웃었다. 어린아이 보는 투였다. 실제로도 나는 성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그는 적게 잡아도 서른 근처를 웃돌았으니 이상한 모양은 아니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퉁명스레 접시를 닦는데 열중했다. 대답 없이 설거지를 하는 내 뒤로 당신이 불쑥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의가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내가 살던 곳은 한 달에 20일씩 눈이 내리는 곳이었어요. 국경의 끝자락의 끝자락이라 누군가 방문하는 일도 드물었죠. 이례적으로 누군가 방문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새를 찾기 위한... 공식적으로는 순례로 불렸죠. 알고 있나요? 새를 기르는 가문의 사람들은 매년 북쪽으로 순례를 오곤 했어요. 막 성인이 되는 아이들부터, 이제는 새를 기르는 대신 아이를 기르는 나이든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중 몇몇은 비밀스레 놓친 새를 찾곤 했죠. 그 몇몇이란 분명 잃은 새의 담당자였을거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그렇듯 일을 수습하는건 본인이어야 할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아니라면 말고요.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 고향은 모든 계절이 얼어있는 곳이었다. 해가 나도 그 따스함에 감탄하기는 어려운 날이 계속되었고, 매년 그 해의 끝자락, 여든 아흐레는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추위가 몰아닥치고는 했다. 아주 꼬마일 적부터 살아가기에는 더 없이 가혹한 곳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것 같다. 그렇지만 삶은 끈질겼고 나의 가족도, 고향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도 이곳의 삶을 사랑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드물게 자비로운체 얼굴을 내밀던 햇빛에 반짝이던 눈송이. 두껍게 얼어붙은 강 위를 미끄러지듯 내달리던 일. 한 쪽에선 그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던 모습. 떼를 지어 날아올라 하늘을 수놓던 새. 눈이 부시도록 하얗던….
그 모든 풍경을 지나며 성년의 길목에 서게 되었을때, 나는 떠남을 선택했다. 이유는 마을의 가장 어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에게 우리는 어째서 북쪽에서 살아가야만 하냐는 질문을 던졌을때 결정된 것이었다. 그는 '우리는 모두 고행길에 오른 순례자로 이곳에서 삶을 마감할 것을 계시받았다. 그래야만 그의 열 한번째 손가락으로써의 미움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들었던 밤이 채 지나기 전에 고향을 떠났다. 그때는 계획했던걸 행했을 뿐이라 믿으려 노력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주어졌던 모든 것이 형벌이었음을, 나의 아름다운 고향이 유배지였음을 알게 된 뒤의 배신감 때문이었다.
당신의 이야기-정확히는 북쪽에 대한 이야기-는 실은 북쪽이 유배지임을 알리며 끝이 났다. 그 뒤로는 어떻게 도시로 나왔는지, 도시에서 나와 어떤 일을 했는지 따위의 자잘한 이야기로 흘러갔고, 나는 접시의 거품을 씻어내며 그것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유배지. 당신이 고향을 말하는 단어는 입 속에서 거칠게 씹혔다. 내가 지금껏 유배자라 여겼던, 유배지라 여겼던 땅이 실은 축복받은 땅이며 우리는 운 좋게도 열개의 손가락 안에 든 자식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 추운 땅을 누군가는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나 역시도 한때는 그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죽어 유배지로 떠난다. 살아 지은 죄를 갚기 위해 가장 추운 땅으로. 새의 몸을 빌려서….
생각하니 울적해지는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말 없이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당신은 내 눈치를 살피다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창 밖을 바라보는 일에 골몰했다.
당신이 방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한 손에는 투박한 가죽 커버로 덮인 책을 든 채였다. 나는 힐끔 눈길을 주었으나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퍽 친숙한 모양새로 옆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입을 뗐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한 척이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쪽, 그러니까 그의 이야기에 아직도 호기심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동생이 있어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질문에 나도 조금 당혹스러워진다. 이런걸 물으려던게 아니었는데. 당신의 분위기나 반응이 어린 사람을 여럿 다뤄본 사람의 그것인지라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실례는 아니겠지. 대강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몸을 바로 해 당신을 바라보았다.
- 동생만이 아니라 형 누나도 많아요. 딱 중간 자식이거든요.
가족을 아끼는지 대답하는 얼굴이 꽤 해사하다. 봐요, 운을 떼며 당신이 책의 표지를 펼쳤다. 첫장은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로 시작했다. 책이 아닌 일기장이나, 그런 종류의 무언가인듯 가죽 커버는 어설프고 마감이 거칠었는데, 손이 많이 탄듯 맨들맨들한 부분도 종종 보였다. 가죽에 오래 시선을 두자 당신이 머쓱하게 말을 얹으며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 무두질을 처음 배웠을때 사용했던 가죽이에요. 뭘 만들까 하다가... 다들 장갑이나 그런걸 만들었는데, 그때 제가 잡았던 도마뱀이 제일 작았거든요. 그래서 아쉬운대로 이걸 만들었는데 아직도 마음에 들어요. 장갑이었으면 아마 작아져서 못 쓰게 되었을테니까.
-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어요? 오래 쓸 수 있다는건 그만큼 기억하기도 쉽다는 이야기니까. 어쨌든 보여주려고 했던건. 음. 이걸 당신이 마음에 들어할지 모르겠어요. 동생이 보낸 편지인데... 나는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동생은 그곳에서 쭉 살고 있거든요. 작년까지는 아홉째가 주로 썼는데, 요즘은 열째랑 열한째가 번갈아가면서 편지를 써주곤 해요. 주로 요즘 안부가 전부지만 고향은 작으니까 개개인의 이야기가 곧 마을의 이야기로 이어지죠.
당신이 건넨 편지지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사생활 아닌가? 내가 그렇게 티가 났나? 기분이 상한건가? 여러 의문을 제치고 단 하나의 질문이 당신을 향한다.
- ...이래도 괜찮아요?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건네던 그 자세 그대로 되묻는다. 네?
- 편지인데... 보여줘도 괜찮냐는 말이에요.
그것도 멀리 사는 동생에게서 온 편지잖아요. 조금은 퉁명스러운 말이 뒤를 따랐다. 이래도 저래도 툴툴거리는 내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이 되었으나 지금의 걱정은 크게 모난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당신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어느 정도는 수용될 것이라 합리화 하는 것이 습관보다 익숙했다.
- 보여줘도 괜찮은 것만 추린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하고, 대답하곤 예의 다정한 웃음을 짓는다. 내가 꼭 당신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까운 표정이었다. 동생이 내 또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받아든다. 편지는 힘찬 필체의 애칭으로 시작했다. 읽는 사람의 얼굴에 절로 웃음을 띄게 만드는 힘이 있는 글씨였다.
[가출한 우리의 여섯째 형 휘에게,]
가출? 단어에 귀를 쫑긋거리며 당신을 바라보자 작은 소리로 웃는다.
- 다들 내가 가출했다고 말해요. 이제 곧 성년을 넘긴지 10년이 되어가는데. 재밌죠?
늘 제가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 그러나봐요. 당신은 웃으며 첫번째 줄을 짚었다. 이게 제 이름이에요. 정확히는 가족이 부르는 이름인데... 휘, 하고 부르면 피리 소리가 나서 종종 순례자들이 방문하면 헷갈리는 일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 피리를 불어서 새를 찾아다니니까요. 휘, 휘, 휘... 높고 낮은 피리 소리가 온 동네를 내내 돌아다녀서 정말 누가 저를 부르는지, 아니면 그저 피리소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니까요…
순례자들이 부는 피리 소리는 꼭 내 이름처럼 들리곤 했다. 휘, 휘, 휘... 휘야, 누구도 부르지 않았는데 고개를 돌려 소리를 쫓으면 괜히 머쓱해 모자만 더 눌러 썼더랬다. 바람 소리와 피리 소리도 닮았지만 바람은 나를 부르는 법이 없었다. 휘, 휘, 휘... 높이가 다른 피리를 불면 어디선가 새가 날아올랐다. 하얀 새였다. 꼭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얘 어디 앉기라도 하면 눈에 쉽사리 띄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검은 부리와 동그란 눈은 그와 대비되어 되려 시선을 끌었다. 야생에서 살기에는 분명 적합치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새가 날아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있는 방향이었다.
폐허는 원래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구조가 복잡해 되도록 아이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창 뛰노는 아이들을 전부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폐허를 놀이터 삼아 자란 아이들은 커서 그곳을 탐사하게 되기도 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고, 결국 내가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직업 역시 그것이었다.
부서진 돌담의 잔해를 건너기 위해 작게 도약하자 미끄러운 바닥에 신발이 닿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돌담에 손을 얹었는데도 제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아마 그때 뒤통수에는 혹을 크게 하나 달고, 왼손에는 자랑스럽게 그 순간 돌담 사이의 책장에서 찾은 책 한 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읽을 수 없는 언어였으나 큰 수확이라 칭찬을 받았던 것도. 할아버지가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다 혹을 누르고 마셨던 것도, 작은 동생들이며 형, 누나들이 그 책에 내내 눈독들여 일기장을 넣어두는 상자에 같이 숨겨두었던 것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첫 직업이자 첫 수확을.
순례자들은 탐사자들이 폐허에서 찾아온 물건들을 가지고 도시로 돌아갔다. 아주 먼, 남쪽의 도시부터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그들이 없는 곳은 없었다 폐허의 물건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면 이 역시 새와 관련된 물품이겠거니, 그저 추측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언젠가는 모두 밝혀 알려주겠지. 그래서 나는 내 직업을 좋아했다. 탐사자라는 명칭부터, 온종일 폐허를 탐사하는 일까지. 여든아흐레, 눈이 그치지 않는 기간에도 폐허에 대한 생각만 했을 정도로. 그러나 두 해가 지나고, 가장 오래 일한 탐사자가 마흔살이 넘을 때까지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우리에게 알려지는 법은 없었다. 꼭... 뭐라고 해야할까. 그때 그 기분을. 그 나이의 나는 '시기를 놓쳐 내린 눈이 이런 기분일 것만 같다.' 고 썼다. 지금 다르게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 쫓겨난 새 같다고 말하지 않을까.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이방인. 그래. 그것이 우리를 지칭하는 또 다른 멸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해는 지나고, 순례자들은 각 도시에서 매 해 찾아왔으므로 피리 소리는 꾸준히 나를 불렀다. 휘, 휘야... 칼바람처럼 높고 날카로운 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리 소리는 그저 눈 내리는 소리처럼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었다. 무뎌졌구나. 둘째 형이 말했고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어른이 되고 싶던 때였다.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굴고 싶을 때였으니까.
그곳을 떠난 지금도 종종 피리 소리를 듣는다. 휘, 휘, 휘. 높고 낮은. 그러나 짧은 세번의 피리 소리. 듣지 않아도 그립다 생각할 때도 있다. 순례자들의 피리. 새가 남긴 유산. 그것을 흉내낸 물건을 구하려 했던 적도 있으나 지금은 부질없어 관두었다. 부끄러운 과거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건넨 편지를 읽는 당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상념을 맺는다. 전부 읽는다면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줄 생각이었다. 누구도 우리의 고향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 없었으므로 그리움은 늘 내 안에 고여있었다. 이렇게라도 흐른다면 내게도 좋은 일이 될테였다.
당신의 짙은 회색의 귀가 쫑긋거렸다. 작은 소음에도 기민하게 반응해 신경쓰였지만 곧 이것도 무뎌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전부 괜찮아 질 것'이라 말하던 낮은 목소리 하나가 귓가를 스쳤다. 오래된 기억이었다. 당신에게서 시선을 떼기 무섭게 당신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청회색 눈동자는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당신은 코를 찡긋거리다가, 이내.
- ...더 읽게 해줄 수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수많은 가정 사이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꽂혔다. 그 눈동자가 여든아흐레의 추위를 뚫고 닿는 빛 같았다.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다. 그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당신을, 휘라는 사람을 조금 알게 된다. 당신은 아이처럼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웃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말 드물어서, 언제든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편지를 받아 곱게 일기장에 끼우며, 당신은 입을 열어 고향을 이야기했다. 피리 소리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기억을.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는 그 소리. 아직도 내용을 모른다는 책과 폐허를 오가며 보았던 새들. 이야기는 멀고 아름다웠다. 알지 못하는 곳의 삶은 모두 이토록 찬란하게 빛이 나냐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그곳이 유배지라 말했지만 내게는 더 나은 곳처럼 느껴진다고. 그러나 알고 있었다. 기억은 왜곡되기 쉬워, 곧잘 아름다운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나는 침묵했다.
당신이 일기장을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잊으려 애쓴 과거 하나를 털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때는 나 역시 그 성에서 새를 기르는 사람으로 자라나고 싶었다… 고. 그랬더라면 우리는 그 추운 곳에서 만났을까. 그것이 궁금했으나 당신의 떠남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사건이었으므로 스쳐지나가지도 못했을지도 몰랐다. 오랜 침묵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해는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아 곧 서늘한 바람이 불테다. 슬슬 허기질 때다, 생각하기 무섭게 당신의 배 속에서 꼬르륵, 내지는 꾸르륵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 배가 고파서 그만… 하하. 저녁은 제가 요리해도 될까요?
머쓱한 웃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 기대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기장을 손에 들고 일어나는 당신이 한결 가뿐해보여, 나도 따라 일어나 부엌을 기웃거렸다. 딱 방해되지 않을 만큼이라 생각했으나 당신이 어떻게 여겼는지는 또 모를 일이다.
요리는 검소하고 독특했다. 이곳에서는 쓰지 않는 조리법이지만 익숙한 향신료를 썼으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나는 버릇처럼 코를 킁킁, 한 번 들썩였다.
- 오해 하지 말아요.
무례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싶었다. 먹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고, 믿지 못해서도 아니라고. 말주변이 없어 그런지 해명은 잘게 썰린 당근보다 짧았다. 백번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나을 테지. 잘 익은 생선 살을 포크로 집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생선은 간이 잘 배어있어 맛이 괜찮았다. 반응을 살피던 당신은 안심한듯 식사를 시작했다. 외롭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식사 시간이었다.
- 오랜만에 고향 생각을 해서 좋았어요. 고마워요. 그러니까…
라이너스. 식사를 마친 당신은 머뭇거리다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부모님이 부르던 이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성질을 따지자면 따뜻한 것. 그 추운 곳에서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따스한 발음이었다. 나는 휘, 하고 짧게 당신을 불러보기로 한다.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입술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휘, 하고.
- 그렇게 고마울 필요도 없어요. 나는 그냥, 내가… 아니. 됐어요.
오히려 내가 고마워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어설프게 말을 마치고 잘 자요, 상투적인 인사만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온 것을 조금은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지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후회하는 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떠날 사람이고 잊힐 기억이라며 애써 합리화 하며 눈을 꾹 꾹 감았다. 밤은 평소보다 느리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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