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오필리아 벨] 열차로부터의 편지 본문
*엔딩 시점으로 읽어주세요.*
발신자도 없이 수신자만 달랑 적힌 편지였다. 악의가 담긴 장난 취급을 받아도 모자랄 것이었지만 편지 봉투 겉에 적힌 꽤 유려한 글씨체 때문인지 생각 외로 편지는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친애하는 ■■,
당신이 없는 열차는 적막하고 나는 늘 이전의 대화를 되짚어보고 있어요. 열차는 여전히 달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죠. 이 편지가 닿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닿기를 바라요. 삶을 잃었어도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게 되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하지만 너무 비웃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사무치게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나요. 늘 같은 지겨운 곳에서는 그 대화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시간이 된답니다. 당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나갔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 슬퍼지곤 해요. 저는 종종, 혹은 그보다 많이. 자주. 당신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끝에서 만나자 했지요. 이 열차에는 끝이 없어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미워하실 건가요. 부디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저의 의지와는 거꾸로 흘러가는 열차의 탓이니. 그렇지만 당신의 원망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죄, 죄이자 재앙. 제가 불러온 재앙입니다.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어떤 순간에는 후회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슬픔에 울어요. 제 눈물은 비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곤 합니다. 너무나 슬퍼 견딜 수 없어요. 세상에 결국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은 다행이지만 후회가 되는 건 왜일까요.
저, 당신이 부러 다르게 말한 편지의 구절을 알고 있어요. 제 이름과 같은 이가 나오는 비극이니 읽지 않았을 리가 없죠. 오래전 저의 운명을 직감한 그 순간부터 곱씹었어요.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화를 낼까요. 하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흐르는 대신 머무르고 싶었답니다.
'별들이 불덩이임을 의심하고, 'Doubt thou the stars are fire;
태양이 움직임을 의심하고, Doubt that the sun doth move;
진실이 거짓이라 의심해도, Doubt truth to be a liar;
행여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 But never doubt I love.
당신은 사랑 대신 당신을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셨죠. -, 제가 당신을 의심하는 법은 없을거랍니다. 그것이 감정이 되든 당신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되든 그럴거예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곧은 눈동자를 가진 당신을.
…그래요, 저는 때늦은 감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간절하다면 닿지 않을까요. 그러기를 바라요. 이마저도 닿지 않는다면 제 슬픔은 어디로 향해야 하나요. 당신에게 향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이다지도 당신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고.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음을 어느 곳에 전해야 하나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가 닿는다 해도 우리는 만날 수 없겠죠.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 아니. 너무나 큰 기적을 바라고 있어요. 언젠가 당신이 제게 말했었죠. 욕심이 많다고. 맞아요. 저는 욕심이 많답니다. 결핍을 몰랐을 적에는 괜찮았는데. 제 결핍과 흠을 너무나 많이 알아버린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저를 용서하세요. 이토록 흠집 투성이인 저를. 망칠 것도 없이 엉망인 저를. 원망해도 좋아요. 그저 저를 완벽히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남겨, 저를 기억해주기를. 그것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지라도 그 틈에 뿌리를 내린 한 송이 작은 꽃이라도 되기를 바라요. 저의 이기심을 용서해요. 그저, 나는…
아, 잘 지내냐고 묻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해버렸네요. 잘 지내나요. 뒤늦은 안부인사지만 잘 지내기를 바라요. 행복하기를 바라요. 그 행복 속에 제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은 없으니 그저, 저는 당신의 행복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당신이 저로 인해 행복할 수 없다면,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저를 영영 잊어주세요. 남은 삶 내내 저를 묻어두세요. 마치 열차에서의 일처럼 보내주세요. 언젠가 제가 되고 싶었던 바람처럼.
당신에게 있어 아주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픈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여린 살에 닿아도 아프지 않을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되기를 바랐답니다. 지금의 당신에게 저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바람보다 가벼워 당신을 스쳐도 아프지 않은 사람인가요.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로서 당신을 괴롭게 만들고 있나요.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고 상대의 상태를 예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곳에는 바람이 붑니다. 저는 4호차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퍽 아름다운 곳이었잖아요, 그곳은. 모두가 떠난 뒤라 더욱 더 그렇게 느껴져요.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보다 외로운 곳. 장미 부인은 입을 다물었고, 창 밖의 풍경은… 글쎄요. 어떤 풍경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더는 숨쉬지 않으니 부러 얕게 숨을 쉬려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숨을 멈춰도 남아있다니 이토록 끔찍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숨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오래인데 바람만이 남아 열차를 맴돕니다. 이 바람은 끔찍한 집착이 되겠죠. 늘 그렇듯 예상하고 있어요. 예견된 미래가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이번의 일과 같이 그것은 분명 제게 찾아와 저를 절망케 하겠죠.
나의 삶이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게 해달라 기도하던 때도 있어요. 이제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재앙은 이미 저를 삼켜버린지 오래이고, 저는 제가 망쳐온 것들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 믿고 있어요. 이게 벌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받아 마셔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종종 제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가늠하고 싶어 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정말 이토록 많은 죄를 지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는지. 의문을 가지곤 해요.
드는 생각들은 모두 비합리적이며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다시 쓰는 것은, 제게 남은 것을 빠트리지 않고 전하고 싶기 때문이랍니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라도 좋으니 전부를.
이토록 엉망인 편지는 부치지도 못할 것인데 버릴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줄이기 전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당신의 끝을 내게 맡겨준 것은 고마워요. 레퀴엠을 연주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끝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죠. 먼저 끝에 와버린것 같으니 당신이 했던 말을 재차 전해봅니다.
친애하는 ■■, 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오세요. 언젠가는 만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된 곳이 있을거라 믿어요. 그 영원의 끝에서,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전부를, 특히 당신을 그리워하는.
오필리아는 쓰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겨우 끝을 마무리한 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적으려 할 때 마다 손이 떨려 그것은 관둔지 오래였다. 오필리아, 오필리아.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녀는 자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 모습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이름에 걸맞는 끝이라고.
잊은 이름이 보고 싶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끝을 예견하고 했던 말인지는 몰라도 곱씹을수록 그것이 서러워 자꾸만 울었다. 4호차, 하늘 정원에서 그녀는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름 없는 무덤 주위로 핀 꽃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었다. 다정해서 슬픈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당신은 없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것이 서러워 무덤에 기대 앉은채 제 편지만을 여러번 읽는게 전부였다.
그녀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신과 나누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시간은 흐르되 흐르지 않았다. 기억하되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편지를 접어 편지봉투에 넣었다. 자신의 이름은 여전히 쓸 수 없어, 발신인도 없는 편지가 되었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시작은 없어도 끝은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지도 몰랐다. 당신이라면 알아줄까. 그녀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바라는 것이 바라지 않는 것보다야 나았다.
사랑, 그 단어 없이도 사랑이 전해질 수 있을까. 그 감정 하나로 이토록 슬퍼지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 차마 할 수 없던 말들의 연유가 사랑임을, 나의 슬픔은 바로 그것에서 기원함을. 누군가는 알아줄까.
듣는 이 없이 이름을 불러보고자 하자 꼭 어느 때처럼 바람이 불었다. 기차가 덜컹인다. 이 선로가 당신에게로 향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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