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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etc.

[담바] 외로운 짐승

루카 Luka 2025. 6. 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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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9

 


 

 

한차례 전쟁이 끝난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기 어린 시멘트 바닥에는 채 씻기지 않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고, 그 탓에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하수구에서는 오래 묵은 쇳새가 났고, 먼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매연이 피어올랐다. 지독한 곳이었다.

다이무스는 그 거리를 바라보며 검집에 튄 어두운색의 점액을 닦아내며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다이무스는 말 없이 검을 빼 들 준비를 했다.

 

"그 냄새, 아직 남아있군."

 

조용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림자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어둠 밖으로 푸른빛으로 변색된 손등이 드러났으나 그것이 어떤 이질감도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때 카모라의 행동대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행적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이무스는 검집을 기울이고 질문을 던졌다.

 

"지금 너는 나의 적인가."

"아니, 어떻게 보면 전쟁 후 남은 잔재와도 같다."

 

당장 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다이무스는 검에서 손을 뗐으나, 여전히 경계를 늦추는 기색은 없었다. 전장에서 마주친 상대를 무턱대고 믿는 일은 없을 수 없는 일이었다. 히카르도는 더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로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씹으며 말했다.

 

"그때처럼 날 경계하겠지."

"경계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다이무스가 막냇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태도로 비뚤게 물었다. 막냇동생처럼 가볍고 경박한 태도는 아니었으나 아주 무거운 태도도 아니었다. 아마도 전투의 흥분이 덜 가신 모양이었다. 어쩌면 전투 후의 대화가 의심스러웠는지도 몰랐다. 전쟁에서 대화란 결국 상대를 동정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 쓸모도 없었으니까. 핑계 없는 무덤 없듯 트와일라잇에 사정없는 이도 드물었다. 그 대답에 히카르도는 짧고 씁쓸한 표정으로 역시 그런가, 중얼거리며 자조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 눈에도 나는 '정상이 아닌' 무언가였겠지. 벌레에 몸을 의탁해 다시 살아나는, 죽여도 죽지 않는흉물."

"그건 네가 상상한 나의 생각 아닌가? 무례하군."

 

다이무스는 잘 벼린 검신을 꽂는 것처럼 무심히 대꾸했고, 히카르도는 그 검이 자신에게 꽂힌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나의 생존법이었어."

 

히카르도는 자신이 살아남은 방법을 말할 때면 흙이라도 씹은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지, 한때는 밑바닥을 구르며 흙과 먼지를 씹은 적도 있으니 그보다는 더 저열하고 끔찍했다. 이를테면 썩어가는 살점 같은 기분이라면 표현이 될까.

 

"믿었던 친구가 내 등에 칼을 꽂았고, 그 뒤로는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지. 가까워질수록 언젠가는 배신하고, 무너지고, 끝내는 썩어버리더군."

"그래서 지금은 뭐지? '복수의 히카르도'? 복수가 끝나고 남는 건 있나?"

"없어."

 

히카르도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웃었다. 어떤 감정도 없는 공허한 미소였고, 다이무스는 그 웃음에 미간을 좁혔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이의 등에 몇 번이고 칼을 꽂는 것이 목적이라면살아있는 시간은 모두 낭비야."

 

그러니 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꾸한 히카르도는 끝내 불붙일 것을 찾지 못한 듯 담배를 뱉어 구둣발로 뭉개버린다. 다이무스는 일련의 행동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판단도 연민도 없는 시선이었다. 마치 그 말에 담긴 무게 따위를 가늠하는 것처럼. 은행원이라더니 저울질에 취미라도 생긴 건지.

 

"넌 아직 살아있다."

"바로 그게 문제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히카르도는 등을 돌렸다. 짧은 여흥처럼 말을 건넸지만 복수에 눈이 먼 짐승이 그렇듯 순간일 뿐이었다.

 

"아니. 모든 것은 썩게 되어있다."

 

다이무스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기가 식은 전장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외로워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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