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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준] 그해 여름의 끝자락.

루카 Luka 2020. 10. 24. 13:52

다이에이 테츠준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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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있던 것은 가을 초입의 일이었다. 3학년은 채 해내지 못한 것을 후배들이 해낸 날. 그라운드는 감격과 기쁨으로 물결치고, 세상을 매몰시킬 것처럼 쏟아지는 함성이 잦아들기 시작할 즈음, 3학년은 경기장을 떠나 먼저 숙소로 향했다. 때마침 지역에 마츠리가 열리는 기간과 경기 시즌이 겹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여름의 끝자락, 그리고 가을의 초입. 승리와 축하란 달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사시키 준은 펄럭거리는 유카타 소매를 갈무리하며 나무 아래에 섰다. 아직 3학년이 전부 나온 것이 아니라… 그래. 전부를 따질 것도 없이 준 홀로 나왔기 때문이다. 마츠리라면 역시 유카타지. 다들 어? 뭘 몰라서 말이야... 생각하던 준은 다른 방에서 나오는 익숙한 얼굴을 보곤 옷차림과 매치시키기 위해 조금 공을 들여야 했다.


"테츠?"


테츠야가 부러 마츠리에 유카타를 챙겨입을 정도로 낭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면 준의 걱정 중 일부는 무용한 것이 되었으리라. 하기는, 낭만 없는 야구돌이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되었겠지만. 준은 언제나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곤 멀찍이서 그를 부른다.


"어이, 테츠!"


제가 여기 있음을 큰소리로 알린 준은 뒤이어 따라오는 일행들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어쩐 일로 유카타를 입었느냐고 물을 기회는 이 뒤로도 있겠지. 너도 답지 않게 축제에 낭만이라도 있는 거냐고. 아니면 누군가 챙겨준 것이냐고. 그것도 아니면 너도 이런 것들을 기대하기도 하냐고. 그렇지만 이사시키 준은 구태여 그것을 묻지 않는다.


일행이 전부 모이자 너나 할 것 없이 마츠리가 한창인 거리로 향했다. 이게 우리 졸업 전 마지막 마츠리겠네, 누군가 말했고. 오늘 경기 끝내주지 않았냐는 흥분한 목소리, 우직하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 전부가 이제는 너무나 익숙했다. 제대로 진로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실감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투수가 되지 못한 이사시키 준은 여전히 이 곳에 있고, 그리 좋은 타자가 아닌 그도 이곳에 아직 남아있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으례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이 여름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 이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뒤돌아 바라보면, 마지막 여름인 지금, 우리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준은 간혹 그런 상상을 한다. 


이 지역 명물이라는 마츠리답게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왁자지껄한 소리, 기대와 즐거움의 목소리. 어린애도 아니건만 이 소란함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던가. 준도 예외는 아니라 온통 번쩍이는 노점들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사람들의 물결 사이에서 일행을 잠시 잃었다.


'애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혼자 설렁설렁 돌아다닐까, 생각하던 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과 사탕을 파는 노점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다가갔다. 노점 앞에서 고민하듯 슬슬 제 턱을 매만지던 준이 '하나 주세요.' 말하려던 그 순간, 누군가 조금은 힘있게 손목을 잡아챈다.


"뭐, 뭐야!"

"…혼자 가길래."

"말로 하면 되는걸. 사람 놀라게…"


몇 마디 구시렁거리던 준은 괜히 후덥지근한 날씨에 손부채질하며 사과 사탕을 하나 사서 테츠야 앞에 불쑥 내밀었다.


"먹을래? 가끔 먹으면 맛있는데. 싫으면 내가 먹고."


테츠야의 긍정, 혹은 부정을 기다리며 그를 응시하는 시선은 평소보다 길었다.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거야? 상대는 그런 식으로 느꼈을 시선.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퉁명스러운 말씨가 들리는 듯한 그 표정에, 테츠야는 간혹 그러했듯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하고자 했는지 고개를 숙여 사탕을 와작, 한 입 깨물었다. 단단한 설탕 코팅이 깨어지고 과육이 갈라지는 소리. 그 소리가 준에게는 왜 그리도 크게 들렸는지. 마치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력과 중력을 깨닫게 되었던 뉴턴처럼, 준은 그 소리에 문득 둘 사이의 인력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맛있냐?"


입안의 것을 잘게 부수어 넘기던 테츠야는 그 말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을 뱉는다.


"달아."

"사탕이니까."


사탕이니까 그렇지. 뭐 그런 싱거운 감상이 다 있냐? 작게 핀잔을 주고서야 주변을 둘러본 준은 다른 일행에 관해 물으려다 관두었다. 건너편 야키소바 노점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세 개... 아니 네 개 주세요."

"학교에서 먹던 버릇 못 버리고 여기서도 그만큼 먹나?"


투닥이는 목소리에 히죽, 웃음을 터트리며 손목을 풀어낸 준은 자연스레 테츠야의 손을 고쳐잡았다. 잡히는 건 아무래도 내 체질이랑은 먼 것 같지, 괜한 우스갯소리는 덤이다. 


"야, 테츠."


언제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올곧은 신뢰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를 향해 준이 가져야 했던 감정은 무엇일까. 그 계절 더운 해가 내내 내리쬐는 그동안... 신뢰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준은 감정을 회피하거나 그것에서 멀어지려 애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되려 마주하고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게 이사시키 준의 방식인 셈이다.


지난 일을 논하자면 이사시키 준은 유우키 테츠야에게 고백했다. 어영부영 후배들이 부르는 바람에 대답은 아직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사시키 준과 유우키 테츠야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잘 지냈다. 적어도 둘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렴, 주변 이들이 아무리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여 끙끙거렸다 하더라도 둘에게 중요한 것은 아마 그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둘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벗어나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것을 보고도 못 본 체 한 것은 어쨌든 그러한 배려였겠지.


준은 테츠야의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혹 달아올랐을지도 모를 얼굴이 드러날까 점점 더 멀리, 성큼성큼. 노점이 늘어선 거리가 멀어지고, 계단을 여러 번 오르고,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 곳까지. 드문드문 이어지던 가로등도 자취를 감추어 어두컴컴한 공원 난간에 이르러서도 잡은 손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말이다. 준은 테츠야가 먼저 손목을 잡았을 때부터 그 의도가 무엇이었다 하더라도 가슴이 쿵, 내려앉아 세상 어딘가가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그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심장이 뛰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은 관두는 게 여러모로 이롭겠지만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만약' 사이에서 살아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 고시엔에서 이겼더라면. 만약, 내가 네 앞번호가 아니었더라면. 만약, 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을 끊어낸 것은 둔탁한 폭발음과 함성이었다. 더불어 쏟아지는 빛도 한몫했을 테지만 소리에 저도 모르게 난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문득 이곳이 그라운드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한 여름 낮의 뜨거운 햇살, 그 아래에 서서 공을 노려보며 네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던 시간. 이제는 지나가 버린 시간...


"불꽃놀이네."


갑작스러운 소리에 먹먹한 귀와 간혹 부는 선선한 바람... 그런 것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이곳이 꼭 그라운드처럼 느껴졌다. 준은 앞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설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적어도 선수로 그라운드를 밟을 일은 없을 테지. 아마 확실한 사실에 가까울 것을, 준은 곱씹는다. 아마 남은 생 내내 지겹도록 곱씹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지겹되 지겨울 수 없는 새로운 후회가 될 테고…


"...어, 예쁘네."


…투수가 되지 못했던 것보다 큰 잔재를 남길 것이다. 그래, 어느 순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슬퍼지기도 하는 법이고, 그게 고교 마지막 여름일 수도 있지. 다만, 준은 이 순간을 놓치면 고백의 답조차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었다. 그러면 정말 고교 생활이 온통 후회투성이가 아닌가. 물론, 이사시키 준이라는 사람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며 지지부진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무언가 하나쯤은 확실했으면, 하고 바랐다.


"야, 테츠."


응. 묵직한 대답이 돌아온다. 불꽃놀이의 소란 속에서도 묻히지 않는 짧고 선명한 대답.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우직한 목소리… 준은 느릿하게, 불꽃과 불꽃 사이의 시간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때… 대답 안 해줬는데."

"무슨 대답?"


아오, 그러니까..., 말을 흐리던 준은 민망함에 빈손으로 난간을 쾅! 내리친다.


"그러니까?"

"고, 고, 고! 고백!"


그리도 우렁차게 대답했지만, 때마침 터진 불꽃 덕에 멀리멀리 울려 퍼지지 않은 게 다행인 사자후. 준은 테츠야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느꼈으나 테츠야 역시 준이 그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설령 변하더라도 그것이 본질의 변화는 아닐 것이라고.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이 단순히 불꽃으로 인한 착시로 보이기를 준은 바라고 또 바랐으나, 재차 터지는 색색의 불꽃에도 여전히 붉은 빛인 것을 보면 아무도 그리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준은 테츠야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이 공원에서 내려가지 않을 생각까지 했다. 어린애냐,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대답은커녕 의식조차 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기우는 틀리는 법이 없지 않던가. 대답을 기다리며, 준은 난간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멀리서 들리는 함성과 웃음, 먹먹한 귀까지... 무엇 하나 그라운드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종 그라운드에 서고 싶어지면, 불꽃놀이를 봐도 괜찮으려나. 오늘 경기장의 열기 속에서 실은 우리를 보았노라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것이 준만의 미련이기 때문이었다. 3학년에게 고시엔은 늘 아쉬운 미련으로 남겠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고. 준에게는 없다. 있는 이와 없는 이의 미련은 필연적으로 무게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다 문득 그토록 찬란한 빛의 범람 속에서, 툭...


"적어도, 너랑 내 사이에서 야구를 빼도 남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뭔지 모르겠으면 됐다. 그냥 속이나 시원해지게 힘차게 차라. 홈런을 날려!"


준의 커다란 목소리 끝에 자잘한 불꽃이 몇 번 터지고, 테츠야가 무어라 대답했으나 그날의 가장 커다란 불꽃을 터트리려는 전조인지 펑, 펑, 펑… 느리고 묵직한 빛이 쏟아졌다. 소란 속에서 '뭐라고?' 되묻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했는지 테츠야가 잡은 손을 끌어 준을 당겼다. 귀엣말로 답해주려나, 생각하던 준은 고개가 가까워지는 것에 그저 뚱한 얼굴을 했을 뿐이다. 여기서 물은 내가 바보지…


그 뚱한 얼굴이 다른 빛으로 물든 것은 테츠야의 머리가 귀엣말하기엔 너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던 찰나, 무언가 입술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니. 준은 순정만화 애독자로서 이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모르기에는 너무나 선명하지 않던가. 키스라고 부르기에도 유치하고, 뽀뽀라기에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에 준은 당장 이 자리에서 우주까지 날아갈 것처럼 놀랐다. 펄쩍 뛰면 대기권을 뚫고 지구를 탈출해 버릴 것 같았다. 테츠야와 붙어있던 시간 만큼 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에는 도가 튼 준으로서는 이게 대답임을 알아차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뜨뜻미지근한 게 대답이냐?'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야구 빼면 제대로 하는 게 없다니까. 잔뜩 붉어진 얼굴로 성을 내듯 테츠야의 유카타 목깃을 잡아 그대로 제 앞까지 끌고 온 준은 고개를 기울여 이렇게 하는 것이라 보여주듯 의기양양하게 재차 입을 맞췄다. 때맞추어 그해 여름 끝자락, 가을의 초입. 그날의 마지막 불꽃이 높은 곳을 향해 쏘아졌다. 비록 여름은 끝났지만, 그들 사이에 남은 것들을 찬찬히 세다 보면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은 계절이 오겠지. 그러다 새삼 무언가 그리워지면 다시 불꽃놀이를 보자고. 아니면 함께 야구를 봐도 좋겠지. 함께라면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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