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Antimony 본문
가까워진 얼굴을 구태여 밀어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로 많은 사람은 호감을 이유 삼을 것이다. 대단한 것이 되고 싶었던 촌뜨기 소녀 카이리였다면 어땠을까? 그 역시 호감과 익숙함과 이 밤의 낯섦을 이유 삼았을 것이다. 낭만이 이성을 지배하는 나이란 으레 그런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보자, 안티는 더는 어린 소녀가 아니며 사냥꾼의 딸도 물정 모르는 촌뜨기도 아니다. 되려 보다 교활하며 약삭빠르고 비겁한 어른이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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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열어둔 창에서 불어온 바람이 서류를 온통 엉망으로 흩트려놓았을 때, 안티는 창을 닫고 힘없이 바닥과 책상, 소파로 뒹구는 종이를 주우며 다른 삶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래. 더 어리고 순진하고 누군가의 흥미를 끌기에는 턱없이 평범하고 무지한 시절의 자신과 당신이 만났더라면. 당신은 내게 눈길 하나 주었을까? 혹 주었다고 해보자, 그래서... 만약 그 숲을 나와 세상으로 향하는 것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쳤더라도 지금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누군가를 탓하거나 아쉬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안티는 그냥, 그저. 다 지워지지 않은 것만 같은 얼룩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이 관계의 어떤 부분은 달라질까? 그렇다면 어떤 것이 달라지고 어떤 것은 불변하여 진실 아래에서 심판받을 자를 두렵게 만들까. 안티는 긴장인지 기대일지 모를 것으로 메어오는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점심, 드, 드셨, 드셨... 드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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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버려도 잡을 수 없는 거지. 고작 직원이 무엇을 이유로 잡겠나? 워렌은 말한 것은 지키는 사장이었고, 불법적인 일로 트집 잡기에는 피차 서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안티가 죽인 사람이 더 많을 테고,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불리한 것은 안티였다. 비밀은 많은 쪽이 더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티는 당신의 공백을 건너기 위해 심호흡한다. 다시금 어두운 물속으로 들어가 숨죽일 때다. 사냥하던 때처럼, 호흡조차 극도로 절제하고, 조준경을 응시하는 눈에선 긴장을 풀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손에는 적당한 힘을.
불발할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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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사무실에 자연스럽게 걸음 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곳에 대한 조사가 모두 끝난 사람이거나 이 장소에 익숙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안티는 귀를 세웠다. 이윽고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실루엣과 금발, 바깥의 찬 공기 냄새를 맡고 나면 어쩐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안티는 오래된 거짓을 제 손으로 벗겨내기로 결심했다. 그가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온통 거짓뿐인 자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밀이 많은 이들은 금방 찔리지 않나. 안티는 형태 없는 불안으로 절절매고 싶지 않았다.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신도 성자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시작된 고해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밤의 마법에 등 떠밀리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거리에서 그저 본인이 그 자체로 거짓임을 말했다. 왜 갑자기 전부 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아니, 거짓이 무대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그래. 어쩌면 이 무대를 망치고 있는 것은 본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해서, 안티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한바탕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곳은 어떤 저주를 받은 미궁인가? 언제부터 혼자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지? 나쁜 버릇이 들었어. 입술을 잘근거리는 얼굴에는 낭패감이 서린다. 안티는 그대로 눈을 내리깔고 겁먹은 얼굴로 밤의 충동질을 견뎌내는 것에 몰두했다. 현기증이 났다. 이럴 바에는 그냥 입을 맞추기라도 할것을. 꼭 당신에게 제가 어떤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더라도 무언가의 의미는 되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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