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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현대 해외 배경

[마리사] 20221016

루카 Luka 2023. 5. 18. 02:14

마리사의 삶은 그토록 단조롭고 평범하여 쉽게 부서지지 않는 성질을 가졌다. 다채롭고 연약하며 유약했더라면 진작 부서져 그 형태를 짐작하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마리사는 개성 없는 모양으로 살아가야 했다. 자신의 영혼이 무언가 특별한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만약 언젠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제야 무게를 실감하고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훗날의 이야기일 테고, 그걸 지금 걱정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해야 했다. 거울에 비친 것이 온전히 제 모습이고, 그 밋밋한 모양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으며.

공책 귀퉁이에 적어둔 수식을 풀다가 선생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칠판을 바라본다. 처음 적을 때부터 잘못되었는지 좀체 풀리지 않던 것을 숫자 하나를 바꾸고서야 겨우 풀어낸다. 간단한 식이었다. 미적분을 배웠다면 손쉽게 풀 수도 있는 문제였고,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여러 개 만들어 내기도 쉬웠다. 마리사는 삶이 수식처럼 손쉽게 딱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오시안 블랙은 문제 중 가장 어려운 것에 속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수식. 혹은 정답이 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방정식…. 충동적인 질문이 가져올 대답조차 예상이 되지 않는다니. 거절당해도 그다지 상관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기왕이면 별로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애매한 대답이라니.

'글쎄, 생각 좀 해보고.'

단정한 글씨체로 써진 모호한 대답과 그 의중을 읽을 수 없던 마리사는 한참 쪽지를 바라보다 접어 필통 안에 넣었다. 그 생각이라는 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뿐더러 적어도 두세 시간은 여유를 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마리사는 평소와 달리 조금 굳은 표정으로 아래 이어지는 문제들을 풀며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자 했다. 혼자 저녁을 먹게 된다면 무슨 영화를 보지? 그래, 저번에 보다 만 예술 영화가 있지, 그것도 좋지만 뮤지컬 영화도 좋을 거야. 다이어트를 하고 있긴 하지만 오늘 하루만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제 또래 애들과 비슷한 것들을 고민하고 저울질하다 보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기도 했다. '오시안 블랙'은 태생부터 저와는 다른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아주 다른 것은 손에 쥐거나 곁에 둘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되레 편안해 지기도 하는 법인가 보다. 마리사는 오시안에게 가진 한 줌 인간적인 호감과 일말의 기대를 내려놓는다. 제게는 애초에 과한 것이었다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생각보다 더 많이 달랐을 뿐이라고.

답을 내놓은 마리사는 언젠가 보았던 오래된 연극의 한껏 과장된 어투를 흉내 내 '왕자님의 귀한 시간을 저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라고 적은 쪽지를 오시안의 자리를 향해 가볍게 던져두곤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마리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채로 두는 것이 낫다. 때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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