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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톈] 우물 본문

1차/현대 해외 배경

[옌&톈] 우물

루카 Luka 2022. 9. 21. 11: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옌은 잘 꾸며진 연극과도 같은 불행을 응시하고 있다. 무능한 가족, 떠안은 빚, 툭하면 고장 나는 난방 기구와 에어컨, 자비도 없이 내리쬐는 여름의 햇살이나 창틈으로 새는 겨울바람…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불행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던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는데. 그다지 교양이랄 것이 없는 옌도 그 말이 인상 깊어 기억하고 있었다. 불행의 낯은 어째 이토록 다채로운지. 불행의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옌은 이런 삶이 때론 지겹게 느껴졌다. 지겹다고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마는.

결론을 말하자면, 옌은 오늘도 고장 난 세탁기 앞에 서서 허공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매미 소리가 멎어가는 여름의 끝, 이 미친 가전제품들은 앞다투어 망가지고 있었다. 냉장고를 고치면 청소기가, 청소기를 고치면 에어컨이, 에어컨을 고치자 세탁기가!
전부 누군가의 농간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병이라며 자신을 다독여도 의심은 고개를 숙이는 법을 모르고 관계의 틈을 엿보았다. 하지만 이 의심을 드러내봤자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나 까딱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심기가 불편하다면 더한 것이 올 수도 있고. 애초에 이 모든 가정이 티엔을 의심한다는 증거였으나 이건 고작 ‘생각’에 불과했다. 아마 제가 의심하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을 것이고, 구태여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수상하다는 뜻이 아닌가? 하여간에, 옌은 빈말로라도 티엔과의 첫 만남이 좋았노라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물정 모르는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고, 호구 잡을 생각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는 것도, 들떠서 판단이 조금 흐렸던 것도 아, 아무튼 몽땅 없던 일이었으면. 젠장! 물론 덕분에 벌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살림이 나아질 만하면 어딘가에 크게 구멍이 났다. 낡은 집이 얌전하면 오라비가 사고를 쳤다. 오라비가 잘못해서 생긴 사고라기보다는 정말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에 휘말려 수습하는데에 번 돈의 배를 쏟아부어야만 했다… 반짝이며 값진 것을 세상 최고로 치는 옌으로써는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려올 수밖에.
여하튼, 캄캄한 우물 속에 내려온 동아줄이 자꾸 끊어지는 모양을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실은 그것을 내려보내준 누군가가 부러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며… 오직 그것뿐이니 외면하지 못하며. 빤히 보이는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다.

그래, 분명 휘둘리고 있다.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 즐기면 어떻게든 지나갈 것이니 옌은 티엔을 보고도 웃을 수 있었다. 가벼운 의심, 그 위에 얹힌 일회성의 웃음들. 값진 것이라곤 없는 이 낡은 우물 속에서 춤을. 달이 뜨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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