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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현대 해외 배경

Anti

루카 Luka 2022. 9. 19. 15:37

그러니까, 안티가 하고 싶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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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 틈으로 바람이 불었다. 어떤 바람은 안티가 떠나온 곳을 스쳐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끔찍해. 무의식중에 든 생각을 역겨운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뱉어 버리고 싶었으나 소리 내 말한다 하더라도 덜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침묵했다. 혹 자신이 흔들려 어느 부분이 넘쳐 사무실을 더럽히게 될까 조금 두려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안티는 워렌이 자리를 비운(혹은 떠난) 사무실에서 내내 머물렀다. 그는 언제나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는 것은 그저 얄팍한 핑계에 불과했고 이토록 얄팍한 핑계는 자기 자신조차 속이지 못하는데도 모순을 외면하며, 안티는 허전한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왜, 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종류의 유령 말이다. 그런 유령들은 장소에 각별한 인연이라도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지금 안티를 붙드는 것은 장소인가? 아니면,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가?

뭔가 대단한 것이 되고 싶었다. 사냥꾼의 딸, 아는 것도 하나 없는 촌뜨기로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살아온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그 숲을 떠나 멀리 멀리 도망쳤다. 철 없는 날의 결정이라는 걸 알지만 돌아가기엔 여간 늦은 것이 아니다. 진정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면 진작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이미 버린 것을 위할 이유가 있을까. 안티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님은 알았다.

-

욕심쟁이네요.

워렌은 그렇게 말했다. 선뜻 어떤 대답도 꺼내지 못한 까닭은 본질이 그러했기 때문일까. 창 틈으로 분 바람에 싸구려 커튼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의미 없는 정보들이 담긴 서류가 책상에서 허공으로, 허공에서 바닥으로 엉망진창 나부꼈다. 그것이 꼭 제 인생 같다고, 안티는 생각한다.

자신 역시 머무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상대가 떠나갔을 때의 허망함이 사람을 꽤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지금껏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것을 상정한 적은 있어도 상대가 먼저 떠나갈 것은 생각도 못했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되어있고 자신만이 살아 숨쉰다고 믿었나? 모든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을 품었나? 아니, 이런 생각들에 침식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안티는 창을 닫고 날아간 종이들을 주워모은다. 의미 없는 이름과 정보, 옛 얼굴, 옛 사진 따위를 쥐고. 카이리, 카이리 허스트… 제 이름 같지 않은 무언가를 자꾸만 중얼거렸다.

욕심쟁이라고 말한다면, 그럴 거예요.
외롭고 싶지 않은 마음도 욕심이라면 분명 그렇겠죠.

맞아요, 사장님. 저는 유예되고 싶어요… 유치한 연극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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