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crab's Blank Pages
[마리사] 다른 사람 본문
20221013
마리사 베네트, 언론이 부르는 별명은 베네트 호텔의 아가씨, 혹은 베네트의 공주님. 마리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주님으로 불려왔고 꼭 그런 것처럼 행동했지만 글쎄, 정말 그렇게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일까, 아니면 한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고고한 공주님일까? 누구도 이런 것을 묻지는 않는 데다 마리사 역시 나서서 이것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고 원치 않았으므로 아무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 마리사는 종종 그것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마리사의 부모는 그가 곱게 커서 버릇없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기를 바라 더욱 엄격히 키웠다. 턱은 당기고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되 너무 오만하지는 않게, 미소 짓되 너무 활짝 웃거나 소리 내지 말 것. 악센트는 분명하되 강하지 않게. 지금껏 배워왔던 것들을 수십 가지는 외울 수 있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신의 것이 된 행동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숨을 어떻게 쉬는지 생각하고 쉬는 사람이 없듯 마리사 역시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유용한 것은 사실이라 부모를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는, 만약 마리사가 부모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종 마리사는 자신이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물건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휩싸이곤 했으므로. 누군가 그에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집안 사업을 잇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 그럼 보자.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우리 학교에 몇 명이나 될까?
그 애들은 그래도 정말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겠지만, 마리사는 그게 아니면 다른 좋아하는 것을 찾기도 막막했다. 그의 세계는 대체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으로 나뉘고, 호불호 역시 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더는 다섯 살 어린애가 아니라 하나하나 좋아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없는 탓이었다. 이런 자신이 답답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되었다. 그렇다고 정말 마리사가 가진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상태가 썩 유쾌하지는 않아서 내가 부모였다면 이렇게는 안 했을 거야, 하고 생각하곤 했다. 꼭 이런 방법 말고도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는 고독했다. 어두운 방에서 영화를 볼 때면 더 그랬고,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이 확실한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랬다.
'그래, 넌 꽤 볼만하고 인기도 많지. 가끔 부러울 정도로.'
좋겠다,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를 부러워했다. 남자애인 점도, 모든 일이 가벼운 것처럼 보이는 점도. 물론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르겠지. 그렇기에 마리사는 더욱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망나니라는 호칭이라던가, 성격이 나쁘다는 것. 마리사는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비웃었으니 같은 부류로 취급 받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자신을 이룬 것들 대부분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거나 그러지 않은 것들이 전부인데, 당신은 온통 이게 나라고 말하듯 반짝였으니.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이든 아니든 별로 상관없었다. 어쩌면 이게 동경이려나.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마리사는 여전히 마리사 베네트고, 오시안은 오시안 블랙일 테니 다시금 의연히 일어나 제 길을 걷는 것다가, 지치면 또 주변을 둘러보고, 저와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함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지루한 수업 시간, 어떤 장난도 없던 그 수학시간. 마리사는 오시안의 책상에 시간이 된다면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는 쪽지 하나를 올려두었다.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
겨우 식사 따위로 조금 구설에 오르는 것쯤은 아마 별것 아닐 테고. 뭐 어때. 캄캄한 방에서 혼자 영화나 보는 건 질렸는데. 마리사는 공책 귀퉁이에 기계적으로 수식을 끄적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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